'철강 메카' 문래동 예술가들 새로운 둥지로 각광예술의 거리로 부활

웃통을 벗은 채 땀을 흘리며 용접을 하고 있는 공장의 노동자들. 철재공장 특유의 선반과 기계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널찍하지도 않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허름한 공장들의 모습과 그 뒤로 비치는 고층 빌딩의 대조는 이곳이 같은 서울이라는 사실을 의심케 한다.

그렇다고 이곳의 정서가 그저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거리 곳곳에 그려진 그래피티들은 삭막하기만 할 것 같은 공장거리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몸을 매개로 하는 무용가와 연기자들은 네모반듯한 직각의 공간을 형언할 수 없는 몸짓과 표정으로 색칠한다.

요즈음 유행하는 첨단과학과 첨단예술의 조우가 아닌, 지난 세기의 기계와 예술의 조화는 이렇게 땀내 나는 아날로그적 정서로 문래동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몇해 전부터 문래동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철재공장의 거리를 새롭게 바꾸고 있다. <빌리 엘리어트>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영국남자들처럼, 처음엔 이곳의 노동자들도 ‘예술’이라는 이름의 이방인들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 지 벌써 5~6년. 이제 쇠와 기계의 거리에서 예술의 흔적을 함께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됐다. 예술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문래동 철재상가에 예술가들이 모여든 것은 ‘돈’ 때문이었다. 문래동 노동자들과 예술가들의 공통점은 ‘가난하다’는 것.

홍대나 대학로의 임대료가 버거운 예술가들에게 문래동의 낡지만 저렴한 공장 건물은 널찍하기도 해 최적의 창작 공간이 되었다. 하나 둘 모여든 예술가들의 입소문이 퍼져 작은 엑소더스가 이어졌고, 지금은 무려 150여 명의 예술가들이 문래동 철재상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문래동의 덕을 보며 그들만의 예술만 해온 것은 아니다. 귀족도, 상류층도 아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듯, 문래동 시민들과 함께 하는 예술행사를 개최하며 시민예술, 거리예술의 영역을 확장해왔다. 거리극과 공공예술 연구 창작단체인 ‘경계없는 예술센터(ASF)’는 단조로운 도심 공간과 문화적으로 척박한 지역에 예술을 통하여 문화적 풍요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이 같은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해오고 있다.

지난 2007년 철재상가에서 ‘용광로에서 희망을’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경계없는 예술센터는 최근까지 문래 근린공원과 철재상가 일원에서 ‘가로등이 전하는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선보였다. 이들은 ‘경계없는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장르를 초월한 다원적 예술 활동을 감상하고 동시에 참여하도록 하는 공공예술 작업을 벌이고 있다.

서울도심에서 펼쳐지는 국제 거리극 축제로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는 비아페스티벌 VIAFestival도 있다. ‘경계없는 예술센터’와 영등포구청과의 협업으로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이 축제는 온앤오프 무용단, 몸꼴, SORO 등 현재 문래동에 거점을 두고 있는 예술단체들이 참여해 문래동 거리에 예술의 향기를 덧입히는 작업을 해왔다.

올해로 3회째를 맞고 있는 ‘물레 아트 페스티발’은 예술과 문래동이라는 지역문화의 완전한 융합을 지향하는 지역문화행사로 자리매김 중이다. ‘문래’라는 발음과의 유사성을 이용한 이 행사는 문래동의 모든 지역을 무대 삼아 문학, 연극, 춤, 마임, 음악, 비주얼아트, 영화, 전시, 토론, 벼룩시장 등 다양한 행사가 열고 있다.

물레 아트 페스티벌에서 <리어카, 뒤집어지다>를 선보인 극단 몸꼴은 영국 에티엔 드크루 마임학교에서 수학한 마임이스트 윤종연 씨가 이끄는 단체. 친구 소개로 이곳에 처음 왔었다는 그는 창작 현장으로서 철재 상가의 장점으로 삶의 열기가 뜨겁다는 점을 든다. “서바이벌 정신이 저절로 생기겠더라고요. 무대는 정직해서 배우나 스태프들이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바로 눈에 보이거든요.”

1-토요춤판 2009’ 참가자들
2-경계없는 예술 프로젝트 공연 모습
3-극단 몸꼴의 야외극 <다시 돌아오다>
1-토요춤판 2009' 참가자들
2-경계없는 예술 프로젝트 공연 모습
3-극단 몸꼴의 야외극 <다시 돌아오다>

물레 아트 페스티발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온앤오프 무용단의 대표와 예술감독인 한창호 씨와 김은정 씨. 부부 무용가이기도 한 이들은 2005년 이문동에서 문래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춤공장’을 열어 춤과 일상의 융합을 다양하게 실험해오고 있다.

한창호 대표는 오히려 공장지대라는 점이 예술창작에 있어 장점이 된다고 말한다. “항상 소음이 있어서 큰 소리를 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또 근처의 철재 상가에서 무대장치나 공연 소품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동안 춤공장에서는 온앤오프 무용단의 주관 하에 현대춤 워크숍과 즉흥 춤판, 즉흥 잼 등 꾸준히 창작과 발표가 이루어져 왔다. 일련의 작업들은 가족잔치나 다름없는 춤 공연의 현실에서 좀처럼 발표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젊은 춤꾼의 소통 창구가 됨으로써, 춤예술의 저변을 확대시키고 문래동 주민들에게는 규격화된 춤과는 다른 춤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

춤공장은 이문동 시절보다 문래동에 오면서 비로소 이름에 걸맞는 의미를 갖게 됐다. ‘공장’이라는 단어가 무용단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 실제 공장들이 즐비한 문래동 철제상가로 옮기면서 온앤오프 무용단과 춤공장은 여러 가지 공정에 의해 새로운 춤을 ‘찍어내듯’ 본연의 매력을 발하고 있다.

마치 춤도 노동이라고 말하듯, 김은정 예술감독은 “춤을 통해 작품을 ‘생산’한다는 뜻에서 ‘춤공장’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명명의 배경을 밝힌다. 춤공장은 올해에는 <토요춤판 2009>와 <돌출춤판 2009>를 마련해 철재상가에서의 새로운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토요춤판 2009>가 8월부터 12월까지 매달 1회 자유참여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예선이라면, 12월에 열릴 <2009 돌출춤판>에서는 발표된 작품들을 엮어서 하나의 섹션으로 공연하는 본선이다. <토요춤판 2009>가 일상으로 들어오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고민이라면 <돌출춤판 2009>는 그것을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넓은 의미의 축제가 된다.

문래동의 철제상가는 1960년대 급속한 공업화로 영등포 일대에 공장들이 집중되면서 형성됐다. 공사용 철근 등 각종 금속 제품을 만들며 ‘철강 메카’라 불리며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오랫동안 과거의 잔재 속에 묻혀져 있던 문래동 철재 상가는 예술가들의 새로운 실험을 통해 예술의 거리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