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세상살이 현대인에 성별불문 공용 비타민 제공

1-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2-연극 <울다가 웃으면>
3-뮤지컬 <맘마미아>

소통불능의 시대, 더욱 고독해지는 사람들에게 ‘침묵은 금이다’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고독을 강요당하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할 상대를 찾는다.

프랑스의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원작을 무대화한 연극 <아트>는 남자들의 수다가 시종일관 시끄럽게 전개되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여자들의 수다와 소재만 다를 뿐, 남자들의 ‘대화’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유치하고 소심한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고가의 한 미술작품을 사이에 두고 의리로 똘똘 뭉쳐 있었던 세 친구가 갈등을 겪다 마음 속에 쌓아두었던 불만을 수다로 뿜어내는 장면은 남성관객에게 공감의 폭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역시 수다의 폭과 깊이에서 여자들의 수다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남자들에게도, 심지어 여자들에게도 ‘지독한 수다’로 알려진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지난달 30일부터 다시 세 명의 배우가 함께 출연해 버전업된 수다를 선보이고 있다.

1996년 미국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2001년 예술의 전당에서 김지숙, 이경미, 예지원 등 세 배우가 주연을 맡아 국내 첫 선을 보인 후 1인극 형식으로 오랫동안 ‘모놀로그’를 펼쳐왔다.

너무 잘 알려진 내용과 콘셉트인 만큼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수다 역시 재공연 때마다 업그레이드의 고민을 거친다. 2009년 버전의 변화는 이경미, 전수경, 최정원 세 배우들의 사생활을 노출시키는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번 공연은 초연 당시와 같이 세 배우가 함께 수다를 떠는 ‘트라이얼로그(Traialogue)’인 셈.

이지나 연출은 “20년을 함께 해 온 베테랑 배우들인 만큼 어떤 토크쇼 형식도 따라하지 않았다”며 배우들에 대한 신뢰를 밝히며, “이들이 가진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들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토크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전수경이 작품을 설명하는 도입부에 이어 최정원이 ‘털이 많아 사랑받지 못했던’ 원작의 사연을 독백으로 보여주며 극이 전개된다. 이미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한바탕 신나는 수다를 춤과 노래로 풀어낸 바 있는 이경미, 전수경, 최정원은 ‘세기로 유명한’ 이 작품에서도 평소의 친근함과 수다를 노련하게 쏟아낸다.

“평소에도 셋이 모이면 수다가 끝이 없다”고 털어놓는 이경미는 “수다를 떠는 것처럼 편안하게 하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도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지난달 3일부터 시작된 연극 <울다가 웃으면>의 수다는 <버자이너 모놀로그>처럼 세지도 않고 뮤지컬 <맘마미아!>처럼 유쾌하지도 않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수다는 촌스럽기도 하고 궁상맞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여자 나이 39살.

누구나 나름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만 어느 때보다 정체성에 대한 갈증과 허망함이 느껴지는 나이. 누군가의 아내, 누구 엄마 등으로 불리며 ‘관계’를 통하지 않으면 불리지 못하는 ‘이름 없는 존재들’. 그런 그들은 관계의 틈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려 애쓰지만 그런 시도조차 쉽지 않다.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수다’. 끊임없이 자기 안의 응어리들을 토해내면서 일시적이나마 이들은 치유되고 구원받는다. 결국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수다의 궁극적 목적은 들어주고 맞장구쳐줄 상대의 존재, 즉 ‘소통’에 있다는 것이다.

두 편의 단막극과 한 편의 이미지극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20대 이후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과 마음 속에만 담아뒀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어느 정도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맛본 30대 후반의 여자들의 ‘꿈’과 ‘결혼’에 대한 회한이 우리 주변의 그것처럼 일상적으로 쏟아진다.

다른 장에서는 같은 병실을 쓰게 된 세 명의 말기 암환자와 한 명의 임신중독증 환자가 무대에 올라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는다.

<울다가 웃으면>의 수다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은 가볍지 않은 인생의 면면들을 옴니버스 형식 안에 담아낸다. 자기 인생을 되찾으려 하지만 의지와는 달리 주변인이 되어가는 현실. 털어놓을 데 없는 고독함. 그래서 이들의 수다는 단순한 친교나 유희라고 보기엔 너무 치열하고 슬프며 아프다.

이 작품에서 극본, 연출, 연기까지 해낸 우현주 연출은 “2009년 현재 대한민국 30대 후반 여자들의 살아가는, 그리고 죽어가는 이야기”라고 작품을 설명하며 “언어의 문학성을 최대한 배제해, 잔인할 정도로 리얼하면서도 우습게 만들어 마치 관객이 일상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고 사실적 수다의 배경을 전한다.

한때 수다는 여자들만의 전유물로 치부되며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해왔다. 정치와 경제에 관한 거대담론을 나누는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경박함을 종종 조롱했다. 하지만 초식남, 토이남이 출현하는 요즈음, 수다는 성별을 불문한 공용 비타민이 되고 있다.

이제 수다는 함께 울고 웃으며 소통하는 각 개인들의 통로 역할을 한다. 누군가에게 답답함을 토로하고 힘든 세상을 견디기 위해, 현실 속, 무대 위에서 현대인은 수다를 떨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