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지젤'창녀가 된 '지젤' 파격적 설정 현대적 재해석과 비판 담아

<지젤>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로맨틱 튀튀를 입은 백색의 정령들. 순박한 시골 처녀와 귀족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그럼에도 결국 신분을 뛰어넘지 못한 운명. 광기에 휩싸인 순수, 그리고 죽음. 하지만 결국 죽음조차도 갈라놓지 못했던 그들의 사랑. 지금 보면 이 대책없는 낭만주의는 결국 <지젤>을 19세기 중반 로맨틱발레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수 있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젤'이 아니다?

하지만 28일부터 3일간 대학로에서 공개되는 <지젤>은 다르다. 발레애호가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로맨틱발레의 서정적인 움직임을 여기서는 기대해선 안 된다. 서울발레시어터가 이번에 선보이는 모던발레 은 여러 측면에서 현대적(modern) 변화들을 보여준다.

한 발레리노는 손을 땅에 짚고 다리를 벌리는 '윈드밀' 동작을 하다 다리를 거꾸로 들어올리는 '나인 투 나인' 동작으로 이어가기도 한다. 이 동작들은 비보이 공연이나 현대춤 공연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발레리노를 엉거주춤 끌어안은 발레리나는 엉덩이를 우스꽝스럽게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심지어 발차기(!)를 하기도 한다. 관객을 향한 뜨거운 두 무용수의 키스씬은 그 중 화룡점정이다.

내용도 완전히 바뀌었다. 원작 <지젤>은 천진한 시골처녀 지젤이 귀족청년 알브레히트를 사랑하다 배신을 당해 죽음에 이르게 되고, 저승에서도 위험에 처한 알브레히트를 지켜낸다는 순정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재해석된 은 마치 요즈음의 막장 드라마나 <사랑과 전쟁> 같은 현대적 정서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지젤과 알브레히트는 무려 '이복남매'다. 지젤의 어머니와 알브레히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불장난'을 한 결과다. 이복남매 간의 금지된 사랑으로 지젤은 결국 창녀촌으로 향하고, 급기야 에이즈로 삶을 마치게 된다. 원작이 사랑의 무한함을 설파했다면, 이 작품은 마치 현실의 냉정함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번 작품을 안무한 서울발레시어터의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은 이 같은 원작의 재해석에 대해 "원작에서 지젤과 알브레히트 주변인물들의 관계를 좀 더 부각시키면서, 2막에서 귀신으로만 등장하는 지젤을 살아있는 모습으로 등장시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지젤이 창녀가 된다는 파격적인 설정에 대해서는 "궁지에 몰린 지젤이 갈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창녀촌을 무대로 하게 됐다"고 밝혔다.

창녀 지젤, 동성애 백조 성공 재현할까

전통의 명작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이처럼 파격적인 설정으로 관객에게 어필한 사례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가 대표적이다. 본의 <백조의 호수>이 발레 팬들에게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클래식 발레가 가지는 성 정체성의 한계를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백조는 '여성'의 영역이었고 그 고정된 백조의 이미지에 칼을 대는 자는 없었다.

본은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 남성 무용수들에게 백조 역을 맡기면서 '백조=여성'의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해소하고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또 남성 주인공과 백조들이 누비는 무대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성애 코드도 해석의 묘미를 배가시키며 여성 관객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원인이었다.

하지만 본의 <백조의 호수>가 큰 호응을 얻은 것은 비단 그런 파격적인 설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작품은 다양한 '모던한' 시도로 클래식 발레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조롱하며 관객에게 또 다른 상상력의 여지를 제공했다. 가령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기 위해 토슈즈를 사용하는 클래식 발레에 견주어, 본은 토슈즈를 조롱 혹은 풍자의 수단으로 연출했다.

무엇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영국 왕실이라는 극중 배경을 통해 주인공의 갈등을 표현하며 그 과정에서 현 시대의 단면을 비판하는 현대적 재해석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토슈즈와 튀튀와 동화적 환상에 너무나 오랫동안 갇혀있는 발레와 발레팬들에게 새로운 재미와 무궁무진한 변주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에 눈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반 관객에도 너무나 익숙한 <지젤>을 도시로 옮겨와 미혼모와 창녀라는 설정에 대입한 것은 모던발레 창작의 여건이 열악한 국내 풍토에서 의미있는 시도로 보인다. 굳이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위상 변화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 같은 시도는 기존 지젤 캐릭터의 정서적 공감대가 현대 관객에게 언제까지 유효할지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처럼 여겨진다.

제임스 전 안무가 역시 "미혼모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인 시선을 담아냈다"며 에 깔린 현대적 정서와 비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형식과 내용을 대폭 바꾼 만큼 공연되는 무대도 새로운 공간에 준비했다. 개관 이후 처음으로 발레 작품을 맞이하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이 그 무대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같은 '극장의 위용'에 압도됐던 관객은 이번만큼은 모든 것이 새로워진 발레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그 시대의 사랑'과 '그 시대의 테크닉'에 질려 있던 발레 팬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헤쳐나가는 현대적 캐릭터와 현대적 동작들은, 익숙한 듯 낯선 모던발레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체험이 될 듯하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