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분식점·캠퍼스 등 청년들의 공간 중심으로 확산

서울 명동 <덕이푸드>에 손님들이 남긴 낙서 메모지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18일 서울 서교동 북카페 ‘토끼의 지혜2’. 수십 권의 책들이 책상 위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 그냥 책이 아니다. 누군가는 펜을 꺼내 열심히 뭔가를 적기도 하고 그리기도 한다. 테이블에 다가가 책을 보니 다름 아닌 방명록. 방명록 아닌 방명록인 이 책에는 방문객이 남긴 낙서가 그득하다.

아날로그 감성의 낙서문화가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다시 돌아오고 있다. 카페∙분식점∙캠퍼스를 비롯한 청년들의 공간 곳곳에서 오프라인 낙서가 눈에 띄게 늘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반영인 이들 낙서에는 청년세대의 절망감∙자괴감이 그대로 반영된 내용이 두드러지지만 위트 있는 비판과 희망의 내용도 있다.

낙서의 귀환은 뭔가 희귀한 것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타난 역전, 즉응적 소통방식에 대한 반발, 기계화의 속도전에 대한 거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아날로그 방식인 낙서 문화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통로를 넓히는 기능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기계화의 한계성과 소통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원인으로 볼 수 있다”며 “디지털 소통이 강화될수록 시간과 공간을 할애하는 것도 큰 선물이 돼가는 현상 역시 가속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페·분식점·캠퍼스, 낙서가 돌아왔다

카페, 분식점, 대학 캠퍼스를 비롯해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전방위적으로 낙서의 귀환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2년여 전부터 부쩍 늘어난 카페·분식점의 낙서가 눈에 띈다. 서울 명동 ‘덕이푸드’ 내부의 벽면에는 손님들이 메모장에 남기고 간 수천장의 낙서가 붙어있다. 곳곳에 손님들이 남긴 사연과 그림이 그득하다.

서울 명동 커피 숍 ‘커피愛 콩나물이 빠진 날’ 역시 2년여 전부터 한쪽 벽면에 낙서 트리를 만들었다. 이 나무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낙서 메시지로 잎사귀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방명록이 낙서장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다. 서울 서교동 북카페인 ‘토끼의 지혜2’의 테이블에 있는 수십 권의 방명록에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낙서가 빽빽하다. 이 카페 역시 2년여 전부터 방명록을 비치해 손님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오래전 문을 연 서울 신촌동 틈새라면 역시 벽면에 붙어 있는 메모장에 낙서가 많다. 대학가의 리모델링 붐으로 새로 들어선 학교 건물에도 낙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백수 세대 자괴감 드러낸 낙서 대세

낙서가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청년세대의 ‘절망감’ 표현이다. 서울 한 카페의 낙서장에는 익명의 방문객이 사람 얼굴과 줄을 그려 놓은 뒤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내 목에 줄을 건다. 웃긴건 걸고만 있지 잡아당기질 못한다. 지저분하게 쇼나 하고 있는 내 모습은. 오늘도 쇼하고 XX했네. XX.’라고 적혀있다.

서울 신촌동 연세대 중앙도서관 2층에서는 ‘어버이날 선물하나 제대로 못해드리고 설거지 해드렸다. 어머니, 아버지 뒷모습이 예전같지 않은데 쓸쓸해 보인다. 삶이란’이란 낙서가 있다.

덕이푸드의 한 메모장에는 ‘그래도 행복하게, 슬픈 현실이지만 이겨내라. 아자아자’란 낙서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자기비하’로 드러나는 ‘루저(loser) 문화’ 역시 청년들이 남기는 낙서에 묻어난다. 토끼의 지혜2에 있는 한 방명록에는 한 여성이 자신의 모습을 그려놓고 안경에는 C급, 바지에는 B급, 벨트에는 샤넬 짝퉁이라고 주석을 달아놨다.

또 다른 방명록에는 한 방문객이 일기 형식의 낙서에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주머니가 너무 가벼워서 가지 못했다. 내 인간성 포기한 듯 하다. 창피한 마음에 문자도 보내지 못했다. 난 인간인가’란 글이 적혀있다.

덕이푸드 관계자는 “취업이 어렵다는 내용이나 지금 힘들다는 내용도 많이 있다”며 “낙서에 댓글을 남기며 서로 위로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들이 예쁜 것 같아, 메모가 너무 많아졌는데도 떼어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1-서울 명동 <덕이푸드>에 손님들이 남긴 메모지 가운데 아랍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쓰인 낙서가 눈에 띈다.
2-서울 명동 <커피愛콩나물이 빠진날> 벽면에 손님들이 적은 낙서를 담은 메모지가 붙어있다.
3-서울 신촌동 연세대 중앙도서관 엘리베이터 안내문에 학생들이 덧붙인 낙서
4-서울 서교동 <토끼의 지혜2> 방명록에 손님이 남긴 낙서 가운데 유명 만화가의 그림

온라인 댓글 문화 오프라인 낙서에도 영향

재미있는 것은 게시판의 의사소통 방식인 댓글 문화가 오프라인 낙서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토끼의 지혜2의 방명록에 한 방문객이 ‘백수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내 나이 30 이전에는 벗어나야 할텐데 2009. 5. 20’이라고 글을 담기자 다른 방문객이 ‘내 나이 30인데 벗어나기 쉽지 않다 2009. 7. 27’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이 카페를 방문한 시인이 ‘흔들리지 않고 핀 꽃이 어디 있나 – 도종환’이란 메시지를 남기자 한 방문객은 꽃 그림을 그려놓고 ‘요 있네. 무뚝뚝. 꽃 그림’이라고 댓글과 그림을 남겼다.

‘당신이 읽을 리 없기에 씁니다. 마침내 당신을 만났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란 글에는 ‘네. 감사합니다’란 댓글이 달려 실소를 자아낸다.

첫 낙서를 한 사람이나 상대가 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왜 낙서에 댓글을 남기는 걸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온라인 메신저, 블로그, 트위터를 비롯한 즉응적 소통방식에 익숙한 세대지만 묵혀서 하는 소통방식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곽금주 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실시간 대화는 매력적이지만 빠른 것에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며 “언제인가는 글을 쓴 사람이 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로 남기는 댓글은 느리고 편안한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 빠름에 대한 추구와 공존한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이모티콘 낙서, 위트 있는 비판도

이모티콘 낙서는 청년 세대의 언어 형식의 변화도 드러낸다. 글자로만 소통하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토끼의 지혜2 방명록에 글을 남긴 한 방문객은 ‘내가 좋아하는 카페의 조건’이란 제목으로 책, 커피, 남자, 옷 등의 이모티콘을 그려 넣었다. 덕이푸드에도 호나우디뉴 캐리커처, 만화가 ‘낢’의 게으른 고양이 캐릭터 등의 이모티콘이 글자를 대신하고 있다.

청년세대에 걸맞은 비판의식과 풍자가 들어간 낙서 역시 웃음을 준다. 고려대 건물 화장실에 붙어 있는 ‘화재시 대피요령’에는 ‘화재시 몸을 피하라’는 개인주의적 메시지를 한 학생이 모두 공동체주의적인 내용으로 바꿔놓아 웃음을 자아낸다.

이 학생은 ‘절대로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를 ‘절대로 당황하지 말로 침착하게 불을 끕니다’로, ‘건물구조에 익숙한 교직원의 안내에 따라 대피합니다’를 ‘건물구조에 익숙한 교직원의 안내에 따라 불을 끕니다’로 바꿔놓았다. ‘엘리베이터 이용은 위험합니다. 정전시 더 큰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란 내용은 ‘엘리베이터 불을 끕니다. 정전시 더 큰 불을 끕니다’라고 바뀌어 있다.

고려대의 일부 단과대 학생회는 화장실에 대자보 용지로 낙서판을 만들어 낙서를 양성화하고 있다. 연세대 중앙도서관에는 건물 리모델링, 화장실 시설 교체에도 아랑곳 않고 낙서가 등장하고 있으며 책상 곳곳에 낙서가 눈에 띈다.

곽 교수는 “지금의 세대가 온라인 대화나 게임·인터넷만 좋아하고 누구와 더불어 대화하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라며 “흔히 젊은 세대들이 개인주의적이고 융합이 안된다고 얘기하지만 그들에게도 사회적 의사소통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있다”고 말했다.



김청환 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