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미술이야기] 영화 와 화가 클림트분명한 탈출구는 오직 관능적 아름다움과 장식적 그림뿐

19세기말, 약 500년간 유럽대륙의 맹주였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세기말을 맞으며 서서히 수명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할 준비를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즉 유럽의 대부분은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조가 사라지고 국민들이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차지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런 시대의 흐름과는 달리 여전히 절대 왕권제를 유지했다.

여기에 특권층이자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지배계급은 기독교 및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민초들 사이에서 운신의 폭이 좁았을 뿐만 아니라 농업이 주업이던 오스트리아는 여타의 다른 국가처럼 산업화와 경제적 근대화에도 뒤쳐져 있어 부르주아 계층은 비록 신분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할 일을 잃은 부르주아 계급들은 문화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래서 대형건축물들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이런 건물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적 관심을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전통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도주를 꿈꾸었던 클림트(Gustav Klimt, 1862~ 1918)는 19명의 학생들과 ‘예술원’을 자퇴한 후 ‘분리파(Sezession)’를 결성하고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To every age its art and to art its freedom)”이라는 구호 아래 인상파의 색을 선이 대체하는 화법을 통해 전통과의 단절과 인상주의에서 표현주의로의 이행을 동시에 수행했다.

이렇게 세기말의 우울을 비구상적 장식을 통해 피해가고자 했던 클림트는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작가로 또 가장 작품값이 비싼 작가로 등극했다. 1897년 결성되어 1900년에 이미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할 만큼 짧은 시간에 즉각적인 성공을 일구어낸 클림트의 분리파는 사실은 노쇠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선택적 친화력’을 통한 사회현상과의 타협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클림트>(Klimt, 2006년 작)는 이런 클림트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정체된 상태에서 심적인 갈등과 갈등 그리고 번뇌하는 클림트의 심리를 현실과 환상이라는 이중적 구조 속에서 드러낸다. 그런 때문인지 영화는 그가 임종을 맞이하는 병상에 누워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조국에서는 홀대를 받지만 파리박람회에서 수상함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클림트(존 말코비치)는 수상 축하파티에 참석한다. 여기서 영화사에서 허구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영화로 만든 전설의 영화감독 멜리에스가 클림트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어 그 곳에서 상영한다.

영화에 나오는 프랑스 무희이자 여배우인 레아(새프런 버로우스)를 보고 그는 이내 그의 평생의 연인인 미디(베로니카 페레스)를 멀리하며 실제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레아에게 빠져든다. 에로틱한 요기를 뿜어내는 욕망의 현신으로 그녀는 클림트의 작품에 큰 축을 이루며 그에게는 환상 속의 뮤즈로 자리한다.

하지만 레아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레아가 등장하고 의문의 사나이가 자신을 그림자처럼 쫓자 클림트는 점차 환영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까지도 실존하는 자신인가 아니면 또 다른 환상 속의 제 3의 인물인가를 고민하면서 그의 방황은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영화를 만든 페루 출신의 라울 루이즈 감독은 철저하게 이중적 구조를 통해 보는 이는 물론 영화 속 클림트에게까지 영화와 현실,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들면서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좌) 키스 (1906~7) (우) 영화 '클림트'의 한 장면

따라서 이 영화는 클림트의 영화라기보다는 클림트라는 소재를 통해 당시 세기말 비엔나의 상황과 환상과 실재, 현실과 환영이라는 인간의 이중적 사고구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의도는 그가 죽기 직전 병상의 모습을 가지고 영화를 시작하는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모호한 정신 상태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지독한 아름다움과 관능적인 에로티시즘 그리고 화면 가득한 장식성의 본질을 그려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모호함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레아’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물론 그는 꿈속의 연인이자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다움의 메시아 레아를 만나려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매다 결국 만나기도 하지만 레아를 만난 인물은 영화 속에서 클림트로 분했던 배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면서 결국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지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명확한 가운데 오직 분명한 탈출구는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장식적인 그림뿐이라는 사실을 설파한다. 결국 영화는 영화 속에서 깨어진 거울에 비춰진 파리의 파티에 참석한 클림트와 레아 그리고 미디 그리고 참석한 유명인사들의 파편화된 이미지일 뿐이며 기억과 추억 그리고 환상의 조합이 삶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주기까지 한다.

영화의 종결부에 등장하는 대사는 이 영화의 의도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보게 클림트, 뭘 그리 놀라는가?, 너무 다른 레아가 그렇게 많은 게 놀라운가? 왜 계속 진짜에 집착하지? 이미 둘이나 가졌잖아? 당신은 진짜야? 그걸 어떻게 증명해?”

그리고 거리로 나선 클림트는 자신으로 분한 배우인 또 다른 클림트를 만나 주먹질을 주고받다 길에 쓰러지고 이때 ‘노’라는 익명의 남자가 나타나 도와준다. 클림트가 대학교수에 지원했을 때, 공모전마다 그를 떨어뜨렸던 ‘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노라고 한 것은 “너무 아름다워서 추해질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위해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고

그는 자신의 미학이나 조형적 방법론을 다른 분리파화가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림은 이러해야 한다는 고착된 견해가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내어 주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과 유사한 화풍의 그림은 당시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적어도 당대 그의 명성과 인기를 감안하면 아류가 나타날 법도 한데 말이다.

다만 클림트는 자신만의 완벽하게 숙달된 기교와 환각에 가까운 상상력이 지닌 지독한 매력으로 신화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자연주의적이지도 않은 예술형식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장식양식은 건축과 일상에 열정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리하여 클림트와 분리파는 아르누보의 공예와 세기말 상징주의, 회화나 디자인의 장르 간 구분을 없앤 예술과 생활, 예술과 수공예 건축물과 장식 등에서 공통적으로 반영되면서 수공예운동(Arts and Craft)과 결합했다. 또 이는 건축에 반영되었다.

분리파로부터 비롯된 “훌륭한 취향”은 단지 기능적인 인공물과 진정한 예술품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제공한 새로운 눈은 모더니즘으로의 문을 열어준 열쇠가 되어 주었다.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