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800여 유작 중 40여 점 엄선 첫 공개… 70여 점은 책으로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우성(又誠) 김종영(1915∼1982)의 서예작품이 처음 일반에 공개됐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각도인서(刻道人書) : 조각가 김종영의 서화(書畵)'전을 통해서다. 김종영의 800여점에 이르는 서예 유작들 중에서 40여 점을 엄선했으며, 70여점을 <우성 김종영의 서예:서법묵예>(열화당)란 책으로 냈다.

일반에게 김종영의 서예는 낯설다. 한국 현대조각의 1세대 작가로 현대조각사에 남긴 족적이 뚜렷한데 비해 그의 서예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종영의 예술관은 서예를 통해 형성됐고 조각으로 발현됐다고 할 수 있다. 김종영 조각에서 보여지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위성을 배제한 '조각하지 않는'(不刻) 조각이란 점이다. 즉 조각하는 물체의 자연성(본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깎고 쪼는 작업은 조각과 자연성의 경계에서 멈춘다. 김종영이 추상 조각을 개척한 것이나 조각 재료로 철조나 화학적인 매재(媒材) 대신 본래적인 질료를 드러내는 나무와 돌을 선호한 것은 같은 이치이다. 그는 나무나 돌을 자신의 이념에 동원시키지 않고 오히려 나무와 돌에 순응해 나무다움, 돌다움을 유지하는 조각으로 일관했다.

김종영의 이러한 '불각(不刻)', '무위(無爲)'의 예술관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 실마리를 그의 서예에서 찾을 수 있다. 김정락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선생에게 있어 서예는 가장 처음 예술로의 입문이자 평생을 두고 유희와 수양의 도구로서 김종영 예술정신의 원천과 궁극적 이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김종영은 5세부터 조부모에게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고, 조예 또한 깊었다. 그는 18세 때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했고, 이당 김은호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본 김종영의 서예작품을 가리켜 "선필(仙筆)"이라 하였다.

그는 특히 완당(阮堂, 추사 김정희)의 예술정신과 서체를 높이 샀다. 완당이야말로 '진실한 노력과 순수한 정신에서 이루어진 예술'이며 그것은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완당의 글씨는 투철한 조형성과 아울러 입체적 구조력을 갖고 있고 동양 사람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적극성을 띠고 있다. 상식적인 일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 작자(作字)와 획(劃)을 해체하여 극히 높은 경지에서 재구성하는 태도며 공간을 처리하는 예술적 구성이며 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지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김종영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열화당 130∼134쪽)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는 "김종영은 자신의 서예관을 완당의 혜안으로부터 세웠다"며 "그가 말하고자 한 예술이란 완당이 보여준 본래적인 맛, 순박한 맛, 단순한 기교, 넘쳐흐르는 힘, 고졸(古拙)함, 한마디로 '무(無)'의 가치에 대한 깊은 이해였다"고 말한다.

김종영이 말한 조각가이면서 조각하기를 거부한 '불각不刻)의 미(美)'(물질에 대한 개입과 변형을 자제하고 재료의 성질을 존중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는 무(無)의 가치를 발견한데서 나왔고 서예는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김정락 학예실장은 "선생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적인 조형관은 서예의 여백이나 장식이나 꾸밈을 철저히 억제한 조형의식에도 연관되어 있다"며 "화려하지 않으나, 기가 충만하고 무게가 있지만, 억누르지 않고, 가볍지만 경솔하지 않은 중용적인 사고가 김종영 서예의 바탕을 이룬다"고 말한다. 김종영이 타계 1년 전인 1981년 67년부터 살아온 삼선교 자택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그곳을 위한 현판으로 쓴 '불각재(不刻齊)' 는 분명하게 그의 예술관을 반영해 주고 있다. 전시작 중 <장자(莊子)>'천하(天下)'편의 "判天地之美, 析萬物之理(천지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만물의 이치를 분석한다)"의 글씨는 김종영 조각의 조형성을 마주하는 인상이다.

전시된 서예작품의 상당수가 도가(道家)의 글에서 발췌한 것은 김종영 예술론의 철학적 근간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장자의 '천도(天'道)'에 나오는 '각조중형이불위교(刻彫衆形而不爲巧)'는 "기교를 피하고 예의 도를 구현하려고 한다"는 김종영의 예술관을 대변한다.

그밖에 고문진보, 논어, 대학, 중용, 효경 등 고전에서 발췌한 것은 그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도덕적 신념과 인생관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종영의 서체는 전통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다. 그는 주로 악필(握筆, 주먹으로 붓을 잡는 방식)로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섬세한 디테일을 표현하지 못한데 반해 강력하고 탈속적이며, 규범이나 전례에 구애됨이 없다.

전시에 선보이는 그림 또한 전통 동양 산수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전통적이며 이미 형식화되어버린 사군자 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식물(제라늄 따위)이나 평범한 사물을 묵화로 그렸고, 풍경화도 실제로 보고 그린 것들이다. 18세기 겸재가 주창했던 진경(眞景 )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정세근 교수는 김종영을 문인화가, 정확히는 문인조각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몸은 현대에 있으면서, 마음은 전통에 두었던.

김종영은 그의 조각예술을 관통하는 '불각(不刻)' 대해 "창조라는 낱말은 나에게는 없다. 자연의 물체가 자연스럽게 있듯이 나의 조형세계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고 정의한다.

그는 정신적 내용보다 기술의 세련에 열중하고, 세련된 기술 자체를 예술로 착각하는 시대를 질타했다. "기술은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좋고 내용과 정신은 풍부할수록 좋은 것이다."

김종영의 서예, 그리고 조각을 포함한 그의 창작 모두는 이와 같은 정신에 발로한다. 김종영 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장이 될 이번 전시는 내달 8일까지 계속된다. 02)3217-6484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