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오네긴' 드라마틱 발레 새로운 화두 던져

음악으로 기억되는 작품들이 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알프레도 아저씨가 남긴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 시작되는 클라리넷 솔로와 이어지는 플루트 솔로. 이윽고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이 등장하면 관객은 어느새 토토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장면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아닌, 음악을 들으면 떠오르는 장면. 그래서 엔리오 모리코네의 '러브 테마'는 그 장면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렇게 존재하는 음악이다.

발레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바로 그런 존재다. '발레는 몰라도 <백조의 호수>는 안다'고 할 만큼 가장 유명한 <백조의 호수>의 음악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곡이다. 역시 대작발레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연말의 스테디셀러 <호두까기 인형>도 '바로 그 곡'들도 그의 손길이 스며있는 작품들이다.

TV광고나 드라마에서도 BGM으로 곧잘 활용되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은 그냥 음악만 들어도 다양한 감정들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곡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발레음악의 진가는 역시 발레와 함께 전개될 때 극대화된다. 발레 대본에 대한 차이코프스키의 충실한 이해와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안무했던 마리우스 프티파의 공동작업은 러시아발레, 나아가 클래식 발레의 황금기를 이룬 큰 부분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다.

차이코프스키의 삶과 음악의 대비

그런데 이번에는 차이코프스키가 음악 뒤에 숨지 않는다. 음악가였던 그가 이제는 발레 무대 전면에 선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각각 <차이코프스키>와 <오네긴>을 무대에 올리며 경쟁하듯 차이코프스키의 현현에 나선 것이다.

10일에 먼저 등장하는 국립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는 차이코프스키 본인의 생애를 다룬다.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공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청년 차이코프스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컨템포러리 발레로서는 드물게 오케스트라도 함께한다.

물론 음악은 '당연히'차이코프스키의 곡들이다. 경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이번 공연에서는 '교향곡 제5번 E단조(Symphony No.5 in E minor, Op.64), 현을 위한 세레나데 2ㆍ3악장(Serenade for Strings, Op.48, Movements 2 and 3 Waltz and Elegy), 교향곡 제6번 B단조 '비창'4악장 (Symphony No.6 in B minor Op.74, 'Pathetique', final) 등 차이코프스키의 곡이 그 자신의 삶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꾸며준다.

<차이코프스키>보다 하루 늦게 시작되는 유니버설발레단의 <오네긴>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Pushkin)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차이코프스키의 서정적 음악을 가미해 탄생한 드라마틱 발레다. 정확히는 차이코프스키가 오페라로 작곡한 피아노곡들을, 작곡가 쿠르트하인츠 슈톨체가 발레용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다.

내용 면에서도 각색이 있다. 발레 <오네긴>은 원작보다 드라마적 요소를 배가시키기 위해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켰다. 두 주인공인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만남과 갈등, 그리고 재회의 과정이 차이코프스키의 로맨틱한 음악과 어우러지며 풍부한 감성을 이끌어낸다. 특히 1막 중 오네긴의 독무와 '피아노를 위한 6개의 소품(Op. 19) 중 녹턴', 2막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 장면과 <사계> '10월 가을의 노래'의 배합은 발레와 음악을 유기적으로 융합시키는 차이코프스키의 능력을 재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두 가지 버전의 차이코프스키, 이 점을 주목하라

그러나 변주된 차이코프스키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현대의 예술가들이다. 이미 지난 2001년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어 기립박수를 이끌어낸 바 있는 <차이코프스키>는 정작 그 이름보다 '보리스 에이프만'의 명성으로 관객 설문조사에서 '다시 보고 싶은 작품 1위'로 꼽혔다. 이제까지 <돈 주앙과 몰리에르> 등 예술가들의 인생을 무대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해온 그는 이번 작품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에 집중하며 이를 캐릭터에도 흥미롭게 반영한다. 그의 내적 분열 상태를 그 자신과 그의 분신으로 표현한 것. 둘로 나뉘어진 차이코프스키가 추는 거친 2인무는 보기 드문 남성 발레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역에 가장 적임자로 평가받는 '제2의 루돌프 누레예프'블라디미르 말라코프와 국립발레단의 젊은 발레리노들의 연기 비교도 좋은 관전 포인트다.

<오네긴>은 지난 2004년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내한공연 당시 강수진이 마지막 장면에서 오열하며 막을 내려 화제를 뿌렸다. 이번 공연은 바로 그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킨 안무가 존 크랑코의 작품이 국내 무용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다는 의미가 있다. 1992년 이후 <오네긴>의 국내공연을 추진해온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 지난해 존 크랑코 재단으로부터 공연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 문 단장은 "그동안 세계의 거장 안무가인 한스 반 마넨, 윌리엄 포사이드, 나초 두아토, 하인츠 슈푀얼리, 오하드 나하린, 크리스토퍼 휠든의 작품을 올렸던 것이 크게 작용을 했다. 그만큼 실력있는 단체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뿌듯해했다.

'보는 발레'에서''보고 들으며 상상할 수 있는 발레'로 발레를 한 차원 끌어올렸던 차이코프스키는 2세기가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예술가와 관객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들은 보리스 에이프만과 존 크랑코가 차이코프스키에게 바치는 거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위대한 예술가는 죽지 않고 끊임없이 예술과 그것의 향유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래서 이번 두 작품은 로맨틱 발레와 클래식 발레 일색이던 현재의 한국 발레에 '드라마틱 발레'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