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디지털 사진진실을 담는다는 이데올로기적 환상 파괴하는 좋은 무기

1893년 혹독한 추위가 닥친 어느 겨울 날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카메라를 들고 뉴욕 5번가의 거리로 나섰다. 도로는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으며, 마차와 행인들이 눈과 추위를 피해서 빠른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스티글리츠는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한 장소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카메라의 셔터가 눌러지고 스티글리츠는 만족한 표정으로 간신히 꽁꽁 얼어붙은 몸을 움직여서 추운 거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던 이유는 눈발이 날리는 도로를 달리는 마차의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사진의 역사에 새겨진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이 일화는 이른 바 '스트레이트 사진'(Straight Picture)의 신화로 기록된다. 스트레이트 사진이란 어떠한 인위적인 가공도 배제한 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순수하게 기록하는 사진을 뜻한다.

스티글리츠가 몇 시간 동안이나 강추위를 견뎌냈던 것은 바로 진실한 순간을 담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스트레이트 사진이란 어떤 순간을 인위적으로 극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극적인 순간 자체를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다.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은 이러한 극적인 순간을 담아내는 데 최고의 능력을 지닌 사진작가 중 하나였다.

스티글리츠의 스트레이트적 접근은 흔히 사진이 회화와 구별되는 본질적 차이점인 리얼리즘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때 사진이 드러내는 현실이라는 것이 어떤 현실인가가 문제가 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의 스트레이트성이 구체적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는 진실의 증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스트레이트 사진은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의 지표이자 확고부동한 증거이다. 수천 개의 기사보다 한 장의 보도사진이 더 큰 힘을 발휘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의 작업을 잘 들여다보면 사진에 대한 그의 관심이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어긋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초기 작업인 '햇빛, 폴라, 베를린'(Sunrays-Paula-Berlin, 1889)에서는 블라인드에 굴절된 외부의 빛이 줄무늬 모양으로 벽과 탁자를 비추며 검은 배경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룬다. 줄무늬는 마치 추상화처럼 화면 전체를 평면적으로 만든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Winter on fifth avenue, New York, 1893. Sunrays-Paula-Berlin, 1889. Equivalent, 1927(왼쪽부터)


그와 교류하며 줄곧 스트레이트 사진을 고수한 폴 스트랜드(Paul Strand)의 작품을 보면 더 분명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의 '추상, 발코니 그림, 트윈 레이크, 코네티컷'(Abstraction, Porch Shadow, Twin Lake, Connecticut, 1916)은 한 눈에 도 한 점의 추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사진이 어떠한 가공도 배제한 순수한 스트레이트 사진이라는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카메라에 담은 극적인 순간들은 가공되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매우 추상적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여객선 삼등칸의 구체적 모습을 담은 순간조차 그의 관심은 여객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위 칸의 상류층과 아래 칸(삼등석)의 서민을 대조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극적 현실 자체이며 이는 마치 한 장의 추상화처럼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다.

이후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등가물'(Equivalent)이라는 하늘을 찍은 연작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선 아예 어떠한 의미 자체도 발견할 수 없다. 하늘이라는 순수한 현실 대상 자체가 추상화처럼 그저 비어있는 공허한 이미지임이 드러날 뿐이다.

롤랑 바르트는 바로 이런 점에서 사진의 근본적인 특성을 푼크툼(Punctum)으로 보았다. 푼크툼이란 스티글리츠나 브레송의 사진이 보여주는 순간적인 찰나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어떠한 의미체계도 거부하는 그 자체로서 무의미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트레이트 사진은 가공되지 않은 현실의 순간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그런데 그 적나라한 현실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텅 빈 기호일 뿐이다. 따라서 스트레이트 사진은 우리가 그것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현실은 애초에 그 의미를 벗어나는 잉여를 지닌 채 비어있음을 드러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스트레이트 사진은 진실의 보증자라는 우리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신하고 만다.

1991년 로스엔젤레스 폭동의 원인이 되었던 로드니킹 구타사건만 해도 그러하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폭행하는 비디오가 공개되면서 흑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비디오는 스트레이트 사진처럼 결코 가공되지 않은 현실의 순간을 담고 있다. 분명 이 비디오를 본 많은 사람들은 백인 경찰이 흑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비디오는 법원에서 증거물로 채택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보기에 따라서는 경찰이 자신을 방어하는 것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결코 가공되지 않고 진실의 순간을 드러내지만 그 의미는 오로지 해석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뿐이다.

디지털 사진이 출현하면서 보수적인 사람들이 가장 걱정했던 점은 사진의 진실성이 증발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제 더 이상 스트레이트 사진이 사진의 미덕이 될 수 없게 되었으며, 사진의 정체성 자체가 위기를 맞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셔터를 누르는 것만큼이나 변형과 조작이 간단해진 탓이다.

하지만 이 위기는 사진이 진실을 담는다는 믿음, 즉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위기이지 결코 사진 자체의 위기는 아니다. 사진은 현실의 보증자이며 목격자라는 신화는 정작 스티글리츠 자신의 관심사와 멀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멕시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페드로 마이어(Pedro Meyer)에게 디지털 사진은 사진에 대해서 지녔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파괴하는 좋은 무기가 된다. 그는 디지털 사진을 통하여 사진에 대해서 가졌던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마음껏 조롱한다.

그 역시 과거 아날로그 사진기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던 작가지만, 디지털 사진이 사진 자체의 위기를 가지고 왔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사진집을 디지털화하여 포토샵으로 변형하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변형 자체가 은폐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 행위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이러한 변형작업을 수행한다.

가령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5달러 지폐에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희생된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의 사진을 넣는다. 이 작품에서 체 게바라의 사진과 5달러 지폐 사이에는 어떠한 봉합자국도 발견되지 않는다. 디지털 합성을 통해서 매끈한 한 장의 완성된 이미지가 탄생한 것이다.

사람들이 체 게바라와 5달러 지폐 사이의 비현실적인 간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단지 반역적인 혁명가와 미국 자본주의의 콜라주를 통한 상징적 희화화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매체론적 관점에서 이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내용적 상징성이 아니다.

내용에만 주목할 때 이 작품은 단순한 콜라주 혹은 포토몽타주 이상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작품은 사진이 진실한 매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희화화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사진은 현실의 보증자가 아닐뿐더러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