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진의 거장전'·'누벨 바크 50주년 기념전'·'사라 문 사진전'으로 회고

1) 브랏사이, 레이스 커튼 앞의 고양이 1937, Brassai ⓒEstate Brassai, Dist. RMN 2)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1932년 작 사진. 기하학적 균형의 절묘한 구도가 놀랍다 3) 앙드레 케르테츠, 우울한 튤립, 1939, Andre Kertesz ⓒ Ministere de la CultureMediatheque du Patrimoine, Dist.RMN
프랑스가 문화와 예술의 나라로 세계에 알려진 것은 드골 정권의 국가 홍보 이미지 전략의 성공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부채춤이나 태권도처럼 '만들어진 전통'이었다면, 프랑스의 '예술의 나라' 이미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프랑스, 특히 20세기 전반의 프랑스는 유럽의 예술중심지라고 할 정도로 새로운 예술들이 새로 탄생하고 내밀하게 발전한 곳이다.

오늘날 많은 예술 장르의 용어들, 특히 낭만주의 시대에서 모더니즘,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관통하는 일련의 예술사조엔 빠짐없이 20세기를 이끌어간 프랑스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근엔 1920년대부터 70년대를 관통했던 '예술로서의' 사진과 영상의 작가들과 작품들을 회고하는 자리도 동시 출현 중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의 협업이 난무하는 새로운 예술 패러다임의 시대지만, 한 세기가 지난 프랑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나 누벨바그의 정신은 현대문화의 끊임없는 소환에 응하며 매번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

빛의 세기를 열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바야흐로 '1인 1카메라'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사진 찍기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일상적 경험이 됐다. 그리고 미니홈피에 업로드하는 수준을 넘어 '출사'를 감행하는 사진 애호의 '2단계'에 이른 자들에게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을 잡아내기 위한 고민이 시작된다.

현대 영상사진의 아버지, 포토저널리즘의 바이블, 사진을 예술로 끌어올린 주역, 무엇보다 광고에서도 차용되고 있는 '결정적 순간'의 주인공. 사진의 역사를 다시 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 찍는 자들이 반드시 거치는 관문이다.

하지만 1920년대의 파리에는 브레송에 앞서, 또는 브레송과 동시대에 '예술로서의 사진'에 쓰일 수 있는 모든 테크닉을 시작했던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달 10일부터 예술의 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세기 사진의 거장전'은 이들의 작업에서 사진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는 자리다.

이번 전시를 위해 프랑스 건축문화유산 미디어테크(La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와 프랑스 국립박물관 연합(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이 소장, 관리하고 있는 20세기 대표 작가들의 작품 중 180여 점이 엄선됐다.

사진은 물론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장르에서 모여든 1920~1940년대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20세기를 관통하는 새로운 가치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이성과 과학의 신뢰 속에서 '긍정의 시대'를 맞이한 예술가들은 사진의 등장에 당장 매료됐다. 그들은 사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순수한 빛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앙드레 케르테츠의 작품은 예술로서의 사진의 선구성을 말해준다. 아방가르드 사진의 핵심적인 예술가였던 케르테츠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휴대용 카메라를 혁신적으로 사용한 사진예술의 선구자였다. 그는 브랏사이, 브레송, 로베르 두아노 등에게 영향을 준 스승이자 동료이기도 했다. 브레송은 "우리가 해온 것은 모두 다 케르테츠가 처음으로 했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포착했던 선배의 '결정적 순간'에 존경심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연세대학교 인지과학연구소의 신수진 교수는 "20세기 초 파리 아방가드르 사진을 중심으로 한 이번 사진전에서 급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낸 '예술로서의 사진'의 진정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시 영화를 묻게 하는 무형의 아카데미, 누벨바그

세계영화사의 여러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누벨바그는, 그러나 1959년부터 불과 3~4년밖에 지속되지 못한 프랑스의 영화운동이었다. 그런데도 왜 세계 영화인들은 계속해서 누벨바그를 되돌아보는 걸까.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의 문법을 전복하고 '영화란 무엇인가'를 물었던 '새로운 물결(Nouvelle Vague)'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국립 시네마테크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èue françise)'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섭렵하고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기고했던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등은 안이한 관습에 기댄 영화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새로운 영화 제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들은 또 '예술로서의 영화'를 주장했다. 영화감독은 작가나 미술가,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이며,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시나리오는 필요 없다', '테크닉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전복적 개념으로 무장한 이들은 비록 전문적인 제작 경험은 부족했지만 대신 예술적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중의 눈에 이들의 작업은 지루한 아마추어리즘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광에 알맞은 필름과 가벼워진 카메라를 사용해 스튜디오에 감금된 영화를 해방시켰고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시선을 변화시켰다. 그들이 필름에 담은 파리 거리의 풍경과 시대의 냄새는 이런 변화들과 함께 영화인들을 예술가로 격상시켰다.

필름포럼은 누벨바그가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올해를 기념해 23일부터 8일간 이 '영화예술가'들의 작품을 상영한다. 누벨바그를 이끈 쌍두마차인 트뤼포와 고다르는 <400번의 구타>와 <줄과 짐>, <네멋대로 해라>와 <남성, 여성> 등을 '누벨바그 50주년 기념전'의 리스트에 올리며 그 상징성을 증명한다.

첫 번째 누벨바그 영화인 클로드 샤브롤의 <미남 세르쥬>도 오랜만에 관객들을 만난다.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불완전한 사회를 바라봤던 이 영화는 트뤼포가 꿈꿨던 '내일의 영화'의 분명한 본보기가 됐다.

시네필을 자처하는 자라면 이미 그 유명한 누벨바그 영화들을 안 봤을 리 없겠지만, 누벨바그 기획전에는 언제나 영화에 대해 묻고 수다를 떨고 싶은 시네필들이 유령처럼 모여든다.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가 여전히 누벨바그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은 것처럼, 시대를 초월한 영화예술에의 '그 정신'을 곱씹으려는 시네필들은 홀린 듯 영화관을 찾을 것이다.

파리보다 매혹적인, 파리를 닮은 이미지 아티스트

프랑스는 문화와 예술의 나라지만 또한 패션의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들 간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별로 의미있는 것 같지는 않다. 패션에는 예술가들의 생각과 작품이 담기고, 패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예술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양쪽을 오가며 활동하는 무경계 이종 예술가들도 있다.

오는 25일부터 예술의전당 브이갤러리에서 첫 한국 사진전을 여는 패션사진의 거장 사라 문은 파리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현대문화의 다양성에 접목해놓은 듯한 작업들을 펼치고 있다. 한때 뉴욕 최초의 샤넬 모델이었던 사라 문은 1968년 패션사진 작가로 진로를 바꾼 후 패션 및 광고, 순수사진 작업을 왕성하게 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78년부터는 영화제작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장편영화 <미시시피 원>과 <접촉>은 영화제에서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사라 문에게 예술과 패션의 구분 대신 그 둘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이미지'였다. 모델로서 한동안 피사체의 역할에 충실했던 그가 내재된 불만을 직접 '찍는 자'로서 표출했을 때, 이미지에 대한 아쉬움은 그 안에 있던 재능과 만나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또 하나의 패션과 예술사진을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를 성사시키기 위해 파리까지 날아가 사라 문을 만난 최연하 큐레이터는 "사라 문의 이미지의 매력은 단순히 예쁜 것만이 아니라 유심히 살펴보면 그 안의 다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언뜻 보면 독특한 색과 빛의 대비가 인상적인 사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미와 추, 신화와 현실, 죽음과 밝음이 역설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 큐레이터는 "사라 문의 사진에선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다 심지어 사진 밖까지 흐른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미지라는 이야기다.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생각과 시도로 이미지에 철학을 담아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그의 작업은 파리라는 공간에서 비슷한 도전을 해왔던 전 세대의 예술과들과 흡사한 궤적을 그린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진가 홍순태도 "사라 문의 사진에선 늘 '파리'라는 말의 기시감이 스며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누벨바그 멤버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장 르누아르는 "예술가는 자기 시대보다 20년은 앞서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항상 말했다. 그래서 누구도 최근 20세기 프랑스 거장들의 사진전과 회고전이 잇따라 이어지는 현상에 대해 '언제적 이야기를 하냐'고 반문하지 않는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들을 먼저 한 이들의 작품에서는 사진을, 영화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했던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이 시대를 초월해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