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질과 몸짓의 말없는 교감에 콘트라베이스 선율이 대화의 색 입혀

공연계에서 다른 장르 간의 협업은 이미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무대 위를 채우는 것은 이제 인간의 신체와 소리만이 아니다. 첨단 영상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공연계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흐름에 관객이 느끼는 단상은 "그래서 뭐?"일 것이다. '순간의 예술'인 춤과 영구적인 예술인 미술이나 영화의 특성이 온전히 섞이지 못한 탓이다. 무용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이고, 뒤에서 '따로 노는' 미술이나 영상의 전시는 대개 현란한 이미지 퍼포먼스만을 재현했다. 창작자의 거창한 철학적 개념을 모르고서는(혹은 알아도), 쉽게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11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는 또 하나의 이미지 퍼포먼스가 열렸다. 그러나 단순한 이미지 퍼포먼스라고 하기엔 뭔가 심상치 않다. 고정좌석이 없는 사각의 무대 가장자리에 관객들이 모이고, 공연이 시작되면 화가가 등장해 무대 한켠에 마련된 유리판에 종이를 깔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어 무용가가 등장해 화가와의 사이에 있는 스크린 캔버스 뒤 공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화가가 그린 그림은 프로젝터의 빛을 통해 스크린에 투사되고 곧 사라지며, 그 찰나의 순간 무용가는 이미지에 반응해 몸을 움직인다. 에너지를 주고받듯 붓의 터치와 스크린 뒤의 몸이 어지럽게 얽힌다.

붓질과 몸짓이 말없이 교감을 계속할 때, 구석에 있던 음악가의 콘트라베이스 선율이 이들의 대화에 색을 입힌다. 이것은 라이브 드로잉 쇼인가, 혹은 캘리그래피(서예) 퍼포먼스일까. 그리고 이 작품의 주체는 셋 중 누구일까.

떠오르는 의문을 풀려 잠깐 몸을 움직이던 관객은 문득 깨닫게 된다. 화가 뒤에서 관람하면 이 작품은 거대한 캔버스 안 세계다. 무용가는 화가가 창조한, 그러나 화가에 의해 온전히 통제받지 않는 살아있는 캐릭터다. 반면 스크린 뒤 무용가에게로 눈길을 돌리면 이것은 전위적인 현대춤 공연에 가깝다.

어쨌거나 음악가건 미술가건 무용가의 춤을 위한 조력자에 불과하다. 이들 사이에 있는 스크린과 음악가의 연주는 양자를 조화시켜주는 존재 같기도 하다. 그러다 관객은 또 깨닫는다. 돌아다니며 관람하는 그들 자신 역시 공연자들에게 신경쓰이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물론 이마저도 계산된 콘셉트에서 진행되는 공연이라는 것을.

결국 이 작품 <'그리고' – 혹은 다른 시각에서 보기>는 미완성된 상태에서 출발해서 공연자와 관객의 상호작용에 의해 순간순간 완성되는 공연이다.

그림과 춤의 즉흥적 교감으로 2차원 예술과 3차원 예술을 교차시킨 두 사람은 재독화가 이승연과 벨기에 브뤼셀 1x2x3 무용단의 안무가 파투 트라오레다. 여기에 재즈음악가 악셀 질렝의 콘트라베이스 연주가 어우러진다. 작품의 기본적인 구상은 파투의 머리에서 나왔다.

자신의 다른 작품 중 춤과 그림이 함께 하는 무용극을 구상했던 그는, 준비해온 그림을 펼쳐놓기만 하는 스페인 화가의 작업에서 한계를 느끼고 춤의 특성과 같이 '지금, 단 한 번뿐인' 그림을 그리며 함께 공연할 수 있는 화가를 찾았다. 이윽고 프랑스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작업을 시작한 두 사람은 이질적인 두 장르가 함께 호흡하는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현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교차되는 이 작품은 순간의 예술인 춤에 영원의 예술인 그림이 다가가야 가능한 작업이었다. 이승연 작가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용가는 몸을 움직이면서 흔적이 사라지잖아요. 그 시점, 그 순간에만 있는 존재죠. 반면 화가의 작업은 흔적을 남겨요. 이 상이한 두 장르의 에너지를 어떻게 소통시키느냐가 고민이 됐죠."

작품의 주요한 문제였던 회화의 순간성, 그리고 즉흥성은 그림을 스크린에 투영시켜 곧바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스크린에 비치는 이 작가의 붓놀림에 따라 파투는 몸을 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에 몸을 교차시키기도 한다. 파투의 움직임은 다시 이 작가의 붓질에 영감을 준다. 매 순간 민감하게 작용하는 상호교감이 두 장르의 차이를 불식시킨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같은 작업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관객이 화가의 뒤에서 관람을 한다면, 이 과정들은 단지 화가가 그리는 거대한 캔버스 속 이야기들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승연 작가로서도 자신의 붓질이 무용가의 동작을 좌우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처음엔 손놀림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파투가 자기에게 맞추지 말라고 하더군요. 오히려 자기가 맞출 테니까 당신은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라고 했어요. 같이 한다는 생각으로, 서로에게 장을 마련해준다는 생각으로 하라고요."

점차 무용가가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면서 서로의 교감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결국은 이 과정 모두가 '서로를 비우는 작업'이었다고 이 작가는 회고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우며 붓과 몸이라는 매체로 교감하던 그들은 어느 순간 함께 춤을 춘다. 서사가 없이 개념으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은 공연이 클라이막스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부분이다.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대척해있던 화가가 스크린 뒤로 돌아가 무용가와 함께 어우러진다. 2차원의 전지적 작가였던 화가는 그 자신이 3차원 현실로 들어와 종이 위에서 직접 그림이 된다. "작은 붓은 손만 움직이면 되지만 큰 붓은 몸 전체가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종이는 단순한 평면이 아니거든요. 하나의 공간이에요. 그 공간에서 나는 붓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붓을 따라가는 거에요. 그렇게 종이라는 공간에서 나와 파투는 함께 춤을 추고 안무를 하는 겁니다."

지난해 프랑스 카바이용 국립극장에서 초연돼 "현대춤과 동양의 묵화, 콘트라베이스 음색이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던 <'그리고' – 혹은 다른 시각에서 보기>는 제목처럼 '다른 시각'에서 볼 때 폭넓은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동시에 예술의 경계를 넘어 인간과 모든 사물을 한 가지 기준으로 규정하려는 인식을 재고하게 한다. 그것은 비단 그림과 춤과 음악의 앙상블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나은 앙상블을 이루며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제언이기도 하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