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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테크놀로지의 뜨거운 만남

펜디·랄프로렌 등 디자인은 클래식, 보여주는 방법은 최첨단
  • 펜디 2010 추동 컬렉션 제품 사진
"패션은 시대를 기록한다."

일본 현대 패션의 거장인 요지 야마모토가 한 이 말은 2009년 지금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패션이 시대를 기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니 패션에 시대가 녹아 있다는 사실이 당대 지성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때부터 패션은 1차 산업을 벗어나 최고의 부가가치를 지닌 3차 산업으로 진화할 기회를 잡았다.

먼 미래의 인류가 21세기 초의 복식을 연구할 때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을 빠뜨리고 넘어간다는 것은 그러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보화 시대, 첨단 과학 기술의 시대는 패션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오랜 관습의 사소한 부분까지 바꿔놓고 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자신들의 고고한 성 밖으로는 한 발짝도 빠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럭셔리 패션 하우스들이 있다.

영화 속 장면이 현실로

지난 7월 말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펜디의 추동 컬렉션은 모델들이 해당 시즌의 대표 의상을 입고 걸어 나오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곧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쇼가 끝나고 전시장 한 가운데 놓인 커다란 스크린에 패션쇼에서 나왔던 펜디의 신제품들과 이탈리아 현지에서 열린 펜디 컬렉션 영상을 볼 수 있었던 것.

  • 나이키 플러스 스포츠 밴드(왼쪽 위), 비비안 탐의 컬렉션(왼쪽 아래), 아이폰과 손 잡은 랄프로렌
여기까지는 놀랄 게 없다. 그러나 스크린에 뜬 사진을 손으로 짚어 벽을 향해 날리는 듯한 동작을 해 보이자 마치 집어 던진 것처럼 '떡'하니 벽면에 사진이 달라 붙었다.

"획일적인 쇼를 벗어나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프레젠테이션하기 위해 시도했습니다. 컬렉션 사진뿐 아니라 전시장 내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도 따로 선 연결 없이 스크린과 벽에 띄울 수 있어서 참석자들의 흥미를 끌었죠."

디지털 디자인 회사인 디스트릭트는 자사의 UX 솔루션 '유니버설 프레임'을 개발해 펜디의 프레젠테이션에 적용시켰다. 그들은 멀티터치스크린을 기반으로 디지털 카메라, 프린터, 스크린, 휴대전화까지 와이어리스(wire-less)로 연동시켜, 고객들은 마음에 드는 상품의 사진을 자신의 휴대전화나 메일로 전송할 수 있고 현장에 있는 상품을 직접 찍어 프린트를 하거나 역시 휴대전화 등으로 전송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케이블 연결 없이 터치와 드래그(drag)만으로 가능하다.

"일종의 장바구니 역할이에요. 이전에는 마음에 드는 제품을 보고도 매장을 나서는 순간 잊어버렸다면 이제는 개인 휴대전화나 메일로 전송해 구매 확률이 높아지는 거죠."

랄프로렌은 이와 비슷한 서비스를 이미 맨해튼 메디슨 애비뉴에 있는 매장에서 시연한 적이 있다.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쇼윈도에서 손가락을 이용해 랄프로렌의 제품을 검색하고 선택해 구매까지 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톰 크루즈가 허공에서 손짓으로 사진과 영상 자료를 지휘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미국 본사에는 최근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관리하는 부서가 생겼어요. 랄프로렌은 전통에 기반을 둔 브랜드지만 나날이 발달하는 기술을 무시하고 성장할 수 있는 패션 업체는 아마 아무도 없을 거에요. 지금은 누가 먼저 시도하느냐의 문제예요."

이를 위해 랄프로렌은 현재 가장 강력한 정보통신도구 중 하나인 아이폰과 결탁했다. 아이폰 사용자들은 아이튠 스토어에서 랄프로렌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받는 간단한 과정만으로 브랜드의 각종 자료들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자료는 랄프로렌 컬렉션 하이라이트 영상, 제품 확대 사진과 설명, 랄프로렌이 그의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는 리키백의 360도 회전 영상, 컬렉션 백스테이지에서 일어난 일들과 기념 행사 영상 등이다. 이 같은 발 빠른 정보화의 선봉장은 랄프로렌의 아들 데이빗 로렌이다.

"우리의 목적은 브랜드의 럭셔리함과 라이프 스타일을 고객들의 손에 쥐어주는 것입니다. 아이폰을 통해 랄프로렌의 눈부신 콘텐츠들을 풍부하고, 우아하며, 편리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전통의 영국 패션 하우스 버버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번 추동 시즌부터 사이트를 개설해 인터넷으로 브로슈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Burberrybrochure.com/kr에 가면 모델들이 버버리의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마우스를 가져다 대면 제품의 상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니트의 짜임과 모직 머플러의 기모까지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상세 이미지다.

사진에 따라서는 브랜드 스토리를 담은 영상이 나오기도 한다. 약 한달 전 런던패션위크 25주년을 맞아 영국에서 열린 2010년 춘하 컬렉션에서는 미처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버버리닷컴에서 실시간으로 컬렉션을 생중계했다. 중계하는 동안에는 아래에 코멘트를 달 수 있는 창을 열어 네티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유도하기도 했다.

글로벌 브랜드의 경우 전세계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IT 기술의 도입은 더욱 절실한 문제다. 나이키는 지난 해 선보였던 나이키 플러스 스포츠 밴드를 업그레이드해 다시 내놨다. 밴드는 손목에 착용하고 밴드 안에 들어 있는 칩을 운동화 밑의 홈에 끼우면 (나이키 플러스라고 표시된 제품에만 홈이 있다) 밴드와 칩이 연동돼 달린 거리, 운동 시간, 속도, 소모된 칼로리 등을 알 수 있다.

밴드의 화면 부분은 따로 떼어내 컴퓨터에 USB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는데, 나이키 플러스 웹사이트에 가입하면 지금까지 해온 운동량과 목표치 등을 분석해 자기에게 딱 맞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제공받을 수 있다. 200만 명에 이르는 회원들 중 목표치가 비슷하고 마음이 맞는 운동 친구를 만나는 것은 덤이다.

패션계에 대한 과학 기술의 내조는 지금껏 은밀하게 진행돼 왔다. 클래식의 대명사인 제냐의 점퍼 속에는 태양열 전지가, 유니클로의 평범한 이너웨어에도 발열 기능이 들어 있다. 그러나 IT 시대가 활짝 열리자 패션 하우스들은 스스로를 알릴 수 있는 이 혁신적인 통로에 앞다투어 투신하고 있다.

물론 재기 넘치는 디자이너들은 IT를 이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패션 아이템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최근 뉴욕 패션위크에서 열린 비비안 탐의 컬렉션을 후손들이 본다면 21세기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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