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호동'각 분야 전문가 협업, 남성 캐릭터 중점, 전통무예 장면 등 색다른 실험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의 한 공연평론가는 "한국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는 많은데 '세계적인 작품'이 없다"고 말했다. 에둘러 말한 것이지만 이 말은 결국 한국의 자생적인 창작 콘텐츠의 부재를 지적한 것이다.

유독 '세계적인 예술가'가 많은 발레계에서 이 문제는 두드러진다. 이제까지 우리의 문화콘텐츠를 기반 삼아 만든 창작공연은 아직도 <판타지발레 바리>와 <심청>, <춘향> 정도만 떠오른다. 근래에 코리언발레씨어터의 창작발레 <몽유도원도>나 서정자의 창작발레 <어부사시사>, 광주시립무용단의 <명성황후> 등이 있었지만 언론과 관객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제작단체의 규모도 있지만, 발레라는 장르 자체가 클래식 발레를 중심으로 한 몇 편의 스테디셀러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까닭이다.

11월 18일 개막을 앞둔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이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몇 년째 반복되고 있는 '심청', '춘향'의 두 콘텐츠를 잇는 새로운 '우리 발레'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자 호동>은 국립발레단의 초대 예술감독이던 故 임성남이 우리의 소재로 한국의 발레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88년에 처음 안무했던 작품. 대개의 발레작품이 여성 캐릭터의 비극성을 내세우거나 작품 자체의 문학성에 중점이 맞춰졌다면, <왕자 호동>은 남성 캐릭터에 중점을 두고 전통무예 장면을 끌어오는 등 기존 발레와 다른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이 눈을 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한국적 발레'를 위해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힘을 합한 협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번 공연을 주도적으로 지휘한 사람은 총연출을 맡은 한국춤 안무가 국수호였다. 1973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해 <도미부인> 등에서 15년 간 주역으로 활동해온 그는 춤극 <고구려>, 춤음악극 <사도> 등 대형 춤극 외 20여 편의 작품을 창작하며 전통춤의 현대적 재구성으로 장르 개척에 주력해왔다. 그는 <왕자 호동>을 통해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피렌체의 가문 사이의 싸움이었지만, <왕자 호동>은 국가와 국가의 이야기이다.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권력을 놓고 사랑을 따라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만연한 사랑, 가령 돈을 따라가는 사랑, 흥미와 쾌락만 좇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재고하게 하는 공연이 될 것이다."

국립발레단 창작발레 '왕자 호동'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은 그에게 총연출을 맡기면서 무대와 음악, 의상에 대한 전권도 위임했다. 그만큼 <왕자 호동>에서 국수호 안무가의 색은 진하다. 그는 "한국의 발레가 세계화될 때 갖추어야 할 조건, 특히 눈과 귀를 세계화시키는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오랫동안 지켜보고 제작진을 결정했다"고 밝힌다.

국수호 총연출의 첫 번째 파트너는 2006년 여성 최초로 국립중앙극장 극장장으로 임용돼 화제가 됐던 신선희 전 극장장. 70년대와 80년대를 미국에서 보낸 그는 당시 체득한 선진 무대 메커니즘을 한국에 들여와 무대미술의 정의조차 불명확했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왕자 호동>에서 무대 디자인을 총괄하게 된 그는 9년 동안 세계 투어를 하고 있는 발레 <홍등>을 언급하며 1년 이상의 제작 준비 과정을 거친 <왕자 호동>에 자신감을 나타낸다.

"고구려는 불이고, 진취적이며, 문명을 추구하고, 남성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불로 상징된다. 이를 위해 빨강, 주황, 갈색을 써 타오르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반면 낙랑은 서해안으로 치우쳐 있어서 해안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여성적인 나라로 봐서 연꽃을 중심으로 흰색, 은색, 회색을 써서 고구려와 대비를 만들었다."

그는 의상을 맡은 제롬 캐플랑과도 작년부터 만나 협의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낙랑문화에 있었던 문양 등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국의 철학과 정서를 차용해 어떻게 현대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했다. 대본이 심플한 듯해도 그렇지 않다. 단순히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국수호 연출이 영입한 조석연은 클래식과 현대음악 두 장르에 모두 정통한 작곡가. 그는 국립무용단의 <그 새벽의 땅>부터 서울예술단 뮤지컬 <바리>까지 동양의 정적인 미와 서양의 동적인 미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조석연은 "후기낭만주의 발레음악 형식인 기본 오케스트라 편성과 20세기 초중반의 형식인 대편성 관현악과 피아노, 혼성합창, 거기에 국악기들을 독주악기로 사용해 동서양의 색깔이 공존하는 음악을 만들었다"고 설명하며 관객과 무용가들 모두에게 새로운 형태의 편성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공연 당시에는 주역 무용수로 무대에 섰던 최태지 예술감독과 문병남 부예술감독은 이번 작품에선 각각 기획과 안무를 맡아 원작의 현대적 재해석에 의미를 더했다. 1998년 <판타지발레 바리>를 안무해 무대에 올렸던 최태지 예술감독은 "당시 작품은 고조선의 무속신화에서 소재를 빌렸지만 현대인의 공감을 받는 데 의미를 두고 한국적인 것보다 발레적인 것에 초점을 뒀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한국적인 것도 발레적인 것도 아닌 세계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여 년 전 최 예술감독과 무대에 설 때부터 <왕자 호동>의 내용 자체가 발레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은 문병남 부예술감독은 "그동안 발레와 한국적 문화를 어떻게 매치시킬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동서양과 시대를 초월하는 요소가 잘 어우러진 '22세기 발레'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작업의 자부심을 나타냈다. 또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가장 주목받는 젊은 안무가인 차진엽도 문병남 부예술감독과 함께 새롭게 태어날 호동 이야기에 현대적 색채를 덧입힌다.

한국춤과 발레, 현대춤과 태권무까지.. 한국 발레의 컨템포러리화에 첫 발을 내딛은 <왕자 호동>은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한국 발레 만들기'라는 목적을 가진 국가 브랜드 공연 사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정답을 알고는 있지만 '한국적'의 현대적 해석에 따라 그 평가는 엇갈려왔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손을 모은 <왕자 호동>은 발전된 답을 찾아냈을까. 관객과 관계자들의 관심이 11월 18일의 예술의 전당에 몰리는 이유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