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지민, 정성룡, 이서윤 전공 바꾼 3人1인 엄마 가정 지원 시설, '몸' 프로젝트, 한복 박물관 건립 꿈꿔
여성학 석사에서 포슬린 아티스트로 변신한 승지민 씨, 포토그래퍼가 된 패션모델 정성룡 씨, 무용 유망주가 아닌 한복 디자이너의 삶을 택한 이서윤 씨. 때때로 우연처럼 다가온 삶의 선물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던 그들. 그들이 삶이 아름다운 건, 선택의 순간 앞에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포기하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가꾸어'가기를 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그들도 훗날 어디에선가 이야기 할지 모른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말이다.
여성학 석사에서 포슬린 아티스트로, 승지민
도자기에 색과 그림을 입히는 포슬린 디자인은 아름다움을 위한 인내의 작업이다. 유약을 바른 도자기 위에 색을 칠하고 가마에 굽고, 이전보다 좀 더 짙은 색을 칠하고 또 다시 구워낸다. 이렇게 몇 차례 칠하고 굽고를 반복하다 보면 청초하기만 하던 순백의 도자기는 어느새 자기만의 색을 머금게 된다.
"미술사 전공으로 갔지만 그 시대엔 학생운동도 많고 특히 여학생들은 여성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많이 하던 때였어요. 저 역시 관심이 많아 세미나에 자주 참여하다 보니, 미술사보다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학에 재미를 느끼게 됐죠."
언니만 셋 있는 딸 부잣집에서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남녀 차별문제를 생각하게 됐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오른 유학 길에선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며 4년 만에 석사 학위를 따냈다. 박사학위 어드미션까지 받아 놓았지만 귀국길에 오른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녀가 포슬린 디자인을 접한 건, 폴란드로 발령 난 남편과 유럽에 오면서다. 미련이 남은 여성학을 공부해 보고자 찾은 바르샤바 대학의 열악한 상황을 보고 낙담하던 차였다.
"아이들 학교 학부형 모임에서 만난 영국 부인을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직접 해보니 너무 재미있었죠.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었지만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욕심이 들더라고요."
후에 독일과 영국에서 '제대로' 포슬린 아트를 배운 그녀는 2002년 한국에 돌아와 지민아트란 이름으로 공방을 열었다. 2004년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IPAT컨벤션에서 은상을, 200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월드 포슬린 페이팅 컨벤션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녀의 행보가 남다른 건, 이때부터다. 2003년에는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2004년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는 저소득층 노인돕기에 전시 수익금을 기부했던 그녀는 2005년부터 줄곧 마리아의 집에 수익금을 전달하고 있다. 최근 마리아의 집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려는 아기엄마와 1:1 결연을 맺기도 했다.
이 같은 활동은 그녀가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줄곧 품어온 문구,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식이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 여성의 노동은 줄곧 그녀의 관심사였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의 어려움은 곧 출산율 저하로 표출되는 거 같아요. 하지만 출산율이 낮다고 하지만 정작 미혼모 가정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죠. 다양한 가정의 형태를 편견 없이 인정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어요."
그녀는 내년 2월에 열리는 전시를 앞두고 여체 토르소와 여성의 손 모양의 도자기를 주문하기 위해 얼마 전 여주에도 다녀왔다. 지난해 작업했던 여성과 생명 테마의 소라와 조개, 그리고 그리스 여신 연작에 이은 새로운 여성 시리즈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포슬린 아트를 취미 이상의 취업으로 연결하는 것, 스스로 아이를 키우려고 하는 미혼모의 홀로서기를 돕는 일이 궁극적인 목표에요." 이를 위해 작게는 지금보다 더 많은 강좌를 만들어 수강생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것, 크게는 1인 엄마 가정을 지원하는 시설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가진 꿈이다.
모델에서 사진작가로, 정성룡
때론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패션쇼에서 런웨이를 활보하던 모델은 포토그래퍼가 되었다. 정성룡 씨(31). 그의 대학 시절 전공은 뜻밖에도 환경공학이었다. 공무원이나 연구원으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던 그의 마음을 돌렸던 존재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나카타니 아키히로의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였다.
대학교 2학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모델 일은 생각보다 잘 풀렸다. 꽃미남도, 그렇다고 키가 월등히 크지도 않던 그는 남성적이고 개성 강한 모델 그룹에 속했다. SFAA 서울 컬렉션에서 그를 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처럼 연륜과 노련함으로 승부할 수 없는 모델 리그에 남은 인생을 걸 수 없었다.
그때 그의 옆에 카메라가 있었다. 세상을 자기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프레임 안에 담아낼 수 있는 카메라는 처음 여자친구를 찍어주면서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서서히 그의 미래가 됐다.
"2002년부터 모델 일과 병행하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잡지에 보면 아마추어들은 하기 어려운 표현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찍는 걸까 궁금했죠. 한참 진로를 고민하던 때가 사진에서 무척 흥미를 느낄 때여서 주위의 조언을 듣고 처음부터 배우기로 했죠."
적지 않은 나이에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로 들어간 그는 월간지 엘르걸과 에비뉴엘에 나오는 제품 광고를 수도 없이 찍었다. 이력이 붙기 시작하자 화보를 찍고 싶어졌고 스튜디오를 나와 지인과 동업을 하며 영역을 확장한 그는 2년 전부터 독자적인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고 있다.
가수 황보, 심태윤, 스테이의 음반 자켓과 뮤직비디오의 스틸, 아모레 퍼시픽 화장품 광고의 현장 스틸, TV프로그램 스틸, 드라마 <발칙한 여자들>의 스틸에 그의 눈길과 손길이 묻어 있다.
카메라 앞에 서던 그가 카메라 뒤로 간 느낌은 여느 포토그래퍼와는 다르지 않을까. "모델을 할 때 포토그래퍼의 심정을 헤아렸다면 더 좋은 모델이 됐을 거에요.(웃음) 아무래도 모델을 했던 사람이 촬영을 하니 모델들이 편안해 하죠. 포즈 요구도 좀 더 자유롭고요. 그런데 찍어보면 타고난 모델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윤진욱 씨가 그렇죠. 연기가 아니라 눈빛이 카메라 자체를 흡입하는 느낌이에요. 송혜교 씨는 여러 각도에서 찍어도 예쁜 배우고요."
모델, 조명, 장소, 그리고 연출까지. 매번 새로운 환경에서 순간적으로 자기만의 앵글에 피사체를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지만 포토그래퍼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찍은 것보다 앞으로 찍어보고 싶은 게 많기 때문이다.
"일생의 숙원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몸'프로젝트에요. 모델의 몸, 정비사의 몸, 트레이너의 몸은 모두 다를 거에요. 직업과 나이에 따라 가기 다른 몸을 담아보고 싶어요. 책이요? 판매되는 책이 될 수도 있고 나만의 책이 될 수도 있죠. 제겐 꾸준히 작업을 한다는 게 중요해요. 마지막 호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죠."
국내 포토그래퍼 중에선 권영호 작가를 좋아한다는 그는 수많은 사진 속에서도 자신의 사진을 골라낼 수 있을 정도로 그만의 독특한 색과 느낌을 갖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무용가에서 한복 디자이너로, 이서윤
지난 9월 초, 북유럽 3개국(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선 한국과 북유럽 수교 50주년을 기념한 한복 패션쇼가 열렸다. 화려하고 우아한 한복의 향연이 끝나자 런웨이로 나와 손을 합장하고 관객에게 인사하는 이는 자그마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요즘 그를 한복 패션쇼 무대에서 보는 일이 어렵지 않다. 북유럽으로 떠나기 직전인 8월 말,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패션쇼에 한국을 대표하는 한복 디자이너 세 명 중 한 명으로 참여한 디자이너도 바로 그였다. 한복 디자이너 이서윤 씨(33).
드라마 <일지매>와 <자명고>의 의상을 맡으면서 이름을 알린 그는 올해로 11년 차의 베테랑 한복 디자이너다. 그러나 과거의 그는 고3때 동아 무용 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한양대에서 한국 무용을 시작한 전도유망한 무용수였다.
창이며 가야금을 배우면서 한국의 멋에 심취했던 7살 꼬마 시절. 한국 무용을 전공한 그는 한복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며 1999년 이서윤 한복이란 이름으로 한복 가게를 열었다. 젊은 남자에게 쏟아지는 편견의 시선을 견디어 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그런 시선 속에서 그는 오히려 강해졌다.
"대학을 다니면서 한복 학원을 다녔어요. 전문가 선생님께 따로 지도를 받기도 했고요. 뭘 하든 인정을 받아야 하는 성격이라서 미쳤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었죠." 무용수가 무대에서 입을 자기 옷을 만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곧 업이 된 경우는 드물지 싶다.
그를 향한 온갖 의구심과 편견이 다소 잠잠해진 건 드라마 <일지매>를 통해서였다. 장신구를 도맡아 디자인하고 조선시대 한복에 이탈리아 실크를 사용했던 <일지매>의 의상은 퓨전 사극을 한결 맛깔스럽게 해주었다. 처음 그의 의상에 반기를 들었던 이들도 그가 가진 독자적인 색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자연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옛날에는 화려하게 꾸미려고 했지만 이젠 유행타지 않고 질리지 않는 미를 찾아내려고 하죠. 가장 단순한 게 가장 어려워요. 조미료가 안 들어 가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어려운 것처럼요."
장신구까지도 그는 일일이 디자인한다. 그의 가게에 진열된 90% 이상의 장신구 역시 모두 그의 손과 감각을 거쳐 태어났다. 그를 한복 디자이너보다 한복 스타일리스트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조선시대 의상을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가 복식 연구를 해 온 과정은 문자 그대로 치열했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 지역인 단동까지 다녀온 적도 있다. "옷은 사람이 죽으면 다 태워버리니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아요. 한번은 태울 옷을 가져오기도 하고 언젠가 북한에서 고미술이나 옷과 민속품이 대량으로 넘어오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단동에 다녀오기도 했어요."
무용수나 국악인, 외교관들이 주 고객이라는 그를 인터뷰하던 날도 탤런트 양금석씨가 그에게 맞춘 한복 두 벌을 입고 경기민요 개인발표회를 하던 참이다.
"한국의 미는 겉은 소박하지만 안을 보면 화려하거든요. 자꾸 보고 싶고, 더 알고 싶은, 그런 아름다움이 좋아요. 한복 박물관을 짓는 게 꿈인데요. 그를 위해서 서서히 준비하고 있어요. 조각은 작아도 다 붙이면 큰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하나씩 해나가려고 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곧 자신이 디자인한 한복을 입고 드레스 리허설 중인 양금석 씨에게 다가가 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