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탄생 100주년 앞두고 국제 포럼 열려 일대기 업적 등 조명

170cm에 가까운 키, 매끈한 몸매, 또렷한 이목구비.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여자답기보다는 오히려 중성답게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자는 무대에 서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나왔다.

두 눈은 별빛 같이 빛나고 입가에는 무슨 요정이나 마술사 같은 웃음이 떠돌고 온몸이 이상한 후광에 휩싸여 그윽한 빛을 발산하는 듯이 보였다'라고 무용가 조택원은 증언한다.

한국의 전설적 무용수 최승희. '한국의 이사도라 덩컨', '세계적 무희', '무용의 신', '동양의 진주' 등 그녀에 대한 찬사도 많다. 현시대 피겨스타 김연아 선수라면 그 인기가 비견될 수 있을까.

2011년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11월 4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국제포럼이 열렸다. 이애순 중국 옌볜대 예술연구소장, 고오노 에이지 문학평론가, 최승희의 직계 제자인 장조해 전 중국발레무극단장을 비롯해 국내외 최승희 무용을 연구하는 학계 인사들과 제자들이 모였다. 2002년 이후 7년 만에 열린 국제포럼이었다. 최승희에 대한 무용계와 언론의 관심을 반영하듯 포럼장의 객석 역시 빈 좌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북한에서의 최승희 무용 회복 실태'와 KBS에서 방영된 바 있는 정수욱PD의 '추적 30년, 영상으로 찾은 최승희'를 통해 그녀의 일대기와 무용계에 남긴 업적 등이 영상으로 공개됐다. 정수웅PD가 최승희의 족적을 따라간 다큐멘터리에서는 그녀가 세계무대에서 어떤 평을 받았는지가 잘 소개되어 있다.

에피소드를 보자면, 1938년 '초립동'을 공연한 후 파리의 언론은 '동양 최고의 무희'라며 격찬했다. 재미있는 것은 공연 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초립동(관례를 치른 소년이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쓰던 갓)을 모티브로 한 패션 모자가 파리에서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단다.

곧 그녀는 전운이 감도는 유럽을 떠나 자신을 초청한 뉴욕으로 갔다. 찰리 채플린도 그녀의 공연을 관람했고, 미모에 반한 로버트 테일러는 영화 출연을 제의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뉴욕에서도 이미 유명인사였다. 당시 그녀의 춤 중에서 뉴요커들은 무녀 춤에 환호했다고 한다.

분단 이후 남편을 따라 월북한 최승희는 김일성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무용연구소를 운영했다. 바로 이 대목이 그녀가 쌓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오랜 세월 금기시되었던 이유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최승희를 시대를 초월해 불러내는 이유는 명백하다. 발레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녀는 흩어졌던 한국 민속 춤을 체계화했다. 해녀나 무녀, 석굴암의 벽조 등의 한국적인 소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한국 무용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여줬고 그런 점을 들어 그녀를 한국 최초의 '한류 스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번 포럼에서 지정토론을 맡은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는 무용가 최승희란 존재의 의의를 이렇게 분석했다. "당시만해도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던 춤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 현대성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점, 한국적 특질이 밴 몸의 테크닉을 통해 민족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라며 "한국 춤의 우수한 자질이나 최승희의 춤 정신은 전승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인사들이 바라본 최승희에는 또 다른 시각이 투영된다. 최승희를 주인공으로 두 편의 희곡을 발표한 고오노 에이지 문학 평론가는 그녀를 '다각적인 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일본의 소설가 아가와 히로유키의 장편소설 <봄의 성>에 등장한 실제 최승희의 춤 공연에 대한 대목을 소개했다.

'저녁부터 와다, 히로카와, 다니이, 쯔쯔미, 히사모토들과 함께 제국극장으로 최승희 춤을 보러 갔다. 꽤 재미있었고, 조선옷을 입고 조선민족 무용 같은 것을 추는 것이 아름다웠다. 춤이 끝나 무대가 암전되고 이윽고 다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자 빛 속에서 최승희가 조선옷을 입고 꿇어앉아서 2층 조선 동포 관객석으로 가만히 마음을 담은 시선을 던져 요염하게 웃었다. 조선인 관객석에서는 굉장히 격한 환성이 울려 그것에 응한다. 우와~ 흥분되어 한때 극장 내가 그 무언의 의지로 압도당해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놀랐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다. 월북이 아니라 친일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부대를 위한 위문공연과 일본 전설을 소재로 한 창작공연 등이 족쇄가 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그녀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최승희의 직계 제자인 김백봉 경희대 명예교수는 "일제 시대에 한국 춤을 추면 경시청의 감시가 심했다. 최승희와 매란방(일본군을 위한 무대에 건강상의 이유로 서지 않았던 중국의 경극배우)을 곧잘 비교하곤 하는데, 이는 비교 불가능하다. 한국 사람의 비운을 누가 알겠느냐"며 친일 예술가로 몰린 최승희를 항변했다.

최해리 한국춤문화자료원 연구위원은 이 문제를 직시하자고 무용계 학자들에게 촉구했다. "위대한 무용가에게 한때의 판단착오로 과오가 있었음을 인정하자. 이 문제를 보다 성숙한 의식과 성찰적 태도로 받아들이고 그간 외면했던 황군 위문활동과 친일 성향의 작품에 대해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최 연구위원은 이어, 최승희를 이 시대에 다시 불러내는 이유는 20세기를 살던 그녀를 모델 삼아 21세기형 한국의 세계적 무용가 탄생을 앞당겨 보자는 데 의의가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