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미술이야기] 영화 <시프하트>와 데 스틸 운동평면과 공간의 구성적 실험 통한 새로운 기법들 생활 속 미술로 자리매김

리시츠키 'Beat the Whites with the Red Wedge'(왼쪽), 시프하트-Gerrit Rietveld&Van Doesburg interior
우리에게 현대미술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전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치피미술관 Uffizi)에 소장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의 <수태고지>(1489년)를 보면 무슨 내용인지 금세 알아차린다.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으며 실제로 그리스도의 회임(懷姙)을 알리는 순간을 본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천사와 성모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별 곤란을 겪지 않고 그 그림을 감상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도 현대미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순간과 장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이란 어쩌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고안해 낸 장치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전제에 동의한다면 모든 그림은 추상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현대미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감정, 바램 같은 추상적인 것을 시각화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한 사람의 생각과 꿈을 읽어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이나 글로 쓰인 경우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도둑인 스코트 뮐러(스티븐 바우어)가 미키(바바라 윌리암스)의 꿈과 내면이 담긴 일기장을 훔쳐 그녀를 읽고 그 바램대로 행동하면서 그녀와 사랑을 만들어가지만 결국 파국을 맞게 되는 영화가 있다. 영화 <시프하트>(Thief of hearts,1984)가 바로 그것이다. 마치 추상미술처럼 사적이고 은폐된 내용을 일기라는 사적인 감정의 기록을 통해 그것을 해독하는 것이다.

시프하트-Gerrit Rietveld, Rood-blauwe leunstoel(1918)(왼쪽), 'Thief of Hearts'(1984)
아동문학가 레이(존 게츠)와의 결혼생활에서 권태기를 맞은 미키는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아주는 자신의 이상형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관록 있는 도둑이자 미술품에 대한 안목도 매우 높은 스코트의 계획적인 접근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미키를 보고 한 눈에 반해 그녀를 쫓기 시작한다. 마치 스토커처럼. 그리고 부부가 외출을 한 틈을 타 그녀의 집에 침입하여 이것저것 훔쳐 나온다. 그녀의 일기장도 함께.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서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녀가 꿈에 그려왔던 남자의 모습으로.

이렇게 속내를 알고 접근한 스코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미키에게 자신의 집 인테리어를 부탁한다. 레이와는 너무 다른 자상하고 감성적인 스코트의 매력에 빠져 서로는 급속도로 친해진다. 하지만 둘 사이의 낌새를 챈 남편 레이는 스코트를 미행해 그가 도둑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레이보다 먼저 미키의 집에 당도한 스코트는 미키에게 사랑의 도피를 행하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미키는 그제야 스코트의 계획을 알고 일기 속 감정은 지금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날 밤 스코트는 일기장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미키의 집에 침입한다. 그때 다른 도둑이 이미 들어있어 그를 쏘고 만다. 이때 미키 부부가 집에 돌아오고 상처를 입은 스코트는 자기가 총을 쏴 죽였다고 말하고 훌쩍 빠져나간다.

이 영화는 영화보다 음악이 더 유명한 영화지만 그중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미키가 스코트의 제안으로 디자인한 그의 창고형 집안의 인테리어이다.

1980년대 영화답게 당시 유행했던 원색의 대비, 그리고 절제된 감각의 가구와 원색의 색채가 기하학적인 형태와 만나 보여주는 인테리어는 현대미술 특히 20세기 초반 유럽미술의 주류를 형성한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유럽의 데 스틸 운동(De stijl)과 맥을 같이 한다.

그 후 1920년 경 목적과 관념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매우 흡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구성주의와 연관 있는 초기의 작품들을 전면 부인하지만 이는 혁명 이후의 러시아 정치상황과도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리시츠키(1890∼1941)만이 러시아와 유럽의 구성주의 이념에 동조하였다.

러시아 태생이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스크바 미술학교 입학이 어려웠던 그는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공부한 후 1919년 러시아로 돌아와 마르크 샤갈의 추천으로 비텝스크의 혁신적인 미술학교 선생으로 취임하고 이곳에서 근무 중이던 카시미르 말레비치(1878~1935)를 만나 그의 재현적인 미술을 거부하고 순수 기하학적 형태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절대주의 운동에 많은 교화를 받는다.

그리고 1921년 모스크바 국립 미술 학교 교수가 되었지만 소련 정부가 모더니즘 미술을 반인민적 미술로 규정하자 조국을 떠나 독일에 다다른다. 독일에서 그는 화가이자 디자이너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예술의 통합을 꿈꾸었던 라즐로 모흘리 나기(1985~1945)를 만나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미술 개념을 서유럽과 미국에 전파했다.

그는 평면과 공간의 구성적 실험을 통해 인쇄술과 광고, 전시디자인, 판화, 포토 몽타주(photo montage), 그리고 건축에서 새로운 기법들을 창안해서 20세기 초 미술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사고는 양식(樣式)이라는 의미의 데 스틸운동으로 이어지면서 모든 조형예술분야의 통합과 일체화를 목표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큐비즘(Cubism)의 영향을 받아 직각과 유연한 평면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추상적 형태, 삼원색과 백, 흑, 회색만을 사용한 순수추상조형을 추구하였다.

이는 순수성, 직관성을 중시하는 몬드리안(1872~1944)의 신조형주의(Néoplasticisme)에서 출발했지만, 1926년 이후 조형물의 효과나 구체성을 중요시하는 반 되스부르크(1883~1931)의 요소주의로 대체되면서 보다 실질적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건축 그리고 인테리어 디자인과 가구 등에 반영되면서 생활 속의 미술로 자리잡아갔다.

현대디자인에 반영된 이런 모던한 양식을 차용해서 스코트의 집을 꾸민 미키는 이곳에서 스코트와 사랑의 일탈을 시도한다. 특히 집안에 놓여있는 몬드리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가구와 벽면장식이 눈에 띈다. 또 바닥의 리시츠키의 <적색 쐐기로 백색을 공격하라, 1919,석판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볼셰비키 군대의 상징인 적색 쐐기가 짜르의 백색군대를 의미하는 흰색을 파고드는 역동적인 이 작품은 영화에서 미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가고자 하는 스코트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할리우드 영화의 멋과 재미, 그리고 스릴 넘치는 마음과 물건을 훔치는 도둑의 행동이 80년대 대표적인 아름다운 선율을 만나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데 여기에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보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영화 <사관과 신사, 1982>의 대본을 쓴 더글러스 스튜어트가 스스로 작품을 쓰고 처음으로 감독한 이 영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렇고 그런 스릴러 드라마로 남았지만 영화에 등장했던 멜리사 멘체스터가 부른 주제곡 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영화 <플래시 댄스>(1983)의 음악을 맡았던 조르지오 모르더(Giorgio Moroder)의 곡으로 지금도 80년대를 회상하는 중장년층들의 귀에 남아있다.

또 당시로서는 새로운 장르였던 전자음악의 기수 헤롤드 헬터마이어가 음악을 맡아 특유의 전자음악은 아직도 신선하다. 음악과 미술이 장면마다 마음을 얻기 위해 도둑질을 마다않는 영화의 재미를 더해 준다.



글 정준모 문화정책, 국민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