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기돈 크레머 되기'클래식, 산업으로 생존 위한 과정 코미디 에피소드 속 노골적 묘사

kremmer
"기돈, 좀 더 빠르게 연주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해. 더 빨리, 더 빨리! 그래. 이제 음악은 그만 됐고 자켓 사진을 잘 찍어야 돼. 아름다운 여자를 모델로 해서 멋있게 말야. (나는 기돈 크레머인데요?) 기돈 크레머라고? 기돈 크레머는 죽었어!"

가슴에 '쿵'하고 떨어지는 충격도 잠시, 어둠 속을 비집고 "내가 기돈 크레머입니다!"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한 명, 두 명, 세 명… 금세 '기돈 크레머'를 자처하는 이들이 다수가 되었다. 떠들썩한 무대와 폭소로 물들었던 객석도 일순 숨을 죽였다.

'파가니니의 환생'이라 불리며 이 시대 최고의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군림하는 기돈 크레머는 지난해부터 <기돈 크레머 되기>라는 독특한 클래식 쇼로 세계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다. 그는 이 무대를 위해 기상천외한 클래식 코미디 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구데스만&주'를 파트너로 선택했다.

기돈 크레머가 이끄는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단원들도 연주를 하다가도 곧 007 선글라스를 끼고 연기를 하거나 연주와 동시에 아이리시 댄스를 훌륭히 춰낸다.

<기돈 크레머 되기>는 기돈 크레머의 음악세계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가의 흥망성쇠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이는 기돈 크레머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인생 여정을 보여준다기보다 그 여정을 통해 클래식 음악 산업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 불황의 늪에서 관객들에게 외면당하고 노쇠해가는 클래식 음악 산업이 음악이 아닌 산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이 코미디 에피소드 속에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구데스만 & 주
'이구데스만&주'의 알렉세이 이구데스만과 주형기는 음악교사가 되었다가, 기돈 크레머의 분신이 되었다가, 음반 프로듀서가 되었다가, 인기에 영합하는 젊은 연주자가 되기도 한다.

팽배한 엄숙주의와 '그들만의 리그'로 두터운 벽을 쌓아오던 콧대 높은 클래식은 그들로 인해 무대 위에서 무장해제 당했다.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하다 보니 마음 한쪽에 묵직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이는 조롱이 아닌 진지한 성찰과 되새김질의 자리가 된다는 데에 진정성이 전해진다.

기쁨의 미소, 누구나 다 아는 쉬운 레퍼토리, 쉽게 연주하는 척하며 천재성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가 현대 클래식 연주자의 미덕이자 본령으로 착각하는 이들을 향해 기돈 크레머는 말한다. "예술가는 몽상가여야 한다"고.

그리고 그는 영화 속 내레이터처럼 마지막 질문을 남기고 어둑해지는 조명 속에서 말러의 10번 교향곡 중 아다지오를 연주하다가 쓸쓸히 사라진다.

"음악 없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요?" 음악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음악 산업 속에서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온몸으로 체험해온 60대의 노 바이올리니스트는 클래식 음악의 존재 의미를 한번쯤 환기시키고 싶었을 거다. 비극의 끝에 코미디가 있다는 말이 울림이 되어 오는 순간이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