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계약서 약관제정, 정부 세제지원 등 거론… 구체적 복안 마련 절실

1- 영화 '집행자' 출연, 제작진, 문광부 방문 탄원서 제출 2- 영화 '집행자'
한쪽은 웃고 한쪽은 운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 <2012>의 흥행 열풍을 바라보는 극장 측과 한국영화인들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대박 가능' 영화에 극장주들은 예의 스크린 밀어주기를 하고 있고, 이에 따라 상영 기회를 빼앗긴 작은 한국영화들은 또 다시 '교차상영'이라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교차상영은 스크린 쿼터를 맞추기 위해 흥행성이 낮은 국내 중소영화를 관객이 별로 들지 않는 조조나 심야 시간대로 나누어 편성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관객이 많이 드는 프라임 시간대에는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흥행력이 검증된 영화가 상영된다. 일명 '퐁당퐁당' 상영에 피해를 입은 제작사는 정부에 호소를 해보기도 하지만, 정부 역시 적극적인 시장 개입에 대해 곤란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12일 개봉한 <2012>는 18일까지 161만여 명을 동원해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지구 종말'이라는 키워드가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비교적 비수기로 꼽히는 요즈음에도 초반의 상승세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3- 영화 '하늘과 바다' 4- 영화 '2012'
여름 성수기 이후 오랜 불황기를 겪은 극장가로서는 반색할 만한 상황이다. 2위에 오른 <청담보살>도 <2012>가 없었다면 얻기 어려웠을 성적이라 예전처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한 반감을 무조건 내비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큰 영화'가 흥행할 때마다 자리를 빼앗기는 '작은 영화'들의 처지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스크린 독과점과 교차상영에 의한 폐해는 최근 2~3년 간 더욱 악화됐다. '잘 되는' 영화는 소위 황금 시간대에, 상대적으로 '안 되는' 영화는 조조나 심야에 배치하는 방식이 고착됐기 때문이다.

18일 현재 <2012>의 상영관 수는 855개로, 영진위에 등록되어 있는 전국 2185개 스크린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있다. 이는 2위 <청담보살>과 3위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스크린을 합한 수보다 더 많은 것이다. 관객들이 구조적으로 <2012>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역대 최다 스크린 점유 기록은 <캐리비안의 해적-세상의 끝에서>(2007)의 912개였지만, 올해 개봉한 <트랜스포머2>는 한때 1219개(교차상영 포함)를 점유해 전체 스크린의 58%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파이의 큰 부분을 빼앗긴 상태에서 나머지 부분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작은 영화들이 결국 일찍 종영을 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얼마 전 작품 안팎의 잡음으로 인터넷을 달궜던 <하늘과 바다>가 그런 경우다. 개봉 2주 만에 관객수 1만 8292명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은 이 영화는 미개봉 상태에서 제46회 대종상영화제에 작품상, 여우주연상, 신인여우상 등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며 네티즌의 도마에 올랐다.

영화가 논란의 정점에 이른 것은 흥행 실패의 원인을 두고 출연배우와 제작자의 교차상영에 대한 다른 시각이 설전으로 이어지면서다.

주연배우 유아인은 교차상영이라는 핑계보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낸 반면, 제작사 제이엔디베르티스망은 '제작자 가족조차 개봉날부터 표를 살 수가 없었다'는 암울한 현실에 근거해 '자진 퇴장'의 원인으로 교차상영을 꼽은 것이다.

<하늘과 바다>는 흥행 부진으로 종영에 임박해 필름 회수라는 얕은 수를 썼다는 비판도 많지만, 현재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 중인 <집행자>는 교차상영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거론되고 있다. 시사성 있는 주제와 비교적 적은 제작비(12억 5천만 원)로 제작됐지만 247개 상영관에서 개봉해 첫주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교도관의 시선으로 사형이라는 사회적 의제를 조명한 이 영화는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해 이귀남 법무부 장관, 유선호 국회 법사위원장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관람하며 사형에 관한 새로운 논제들을 불러 일으키며 화제를 양산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1주일 후 <2012>와 <청담보살> 등이 개봉하자 2주 만에 교차상영을 통보받았다. 교차편성 이후 상영관은 343개로 늘어났지만 관객 수는 급감하며 1주 만에 5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첫주 성적이 이후의 흥행을 결정짓는 경향이 강했던 만큼 <집행자>의 교차상영 결정은 장기흥행의 가능성이 점쳐지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관계자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불공정한 상영문화에 항거하는 차원에서 주연배우 조재현과 최진호 감독, 제작사 활동사진 조선묵 대표, 배급사 실버스푼 이재식 대표가 삭발 투쟁까지 감행하려 했지만 기자회견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들은 문화체육관광부를 방문해 불공정한 상영문화로 피해를 입는 '작은 영화'들을 위해 정부 차원의 대책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유인촌 장관은 "정부 입장에서 강제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도 "극장들이 상업적 논리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불공정 거래 등에 대해 살펴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교차상영에 대해 멀티플렉스 측은 대체로 "시장논리로 보면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윤 추구가 우선인 멀티플렉스 입장에서는 흥행력이 높은 영화를 많이 편성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이들은 교차상영 편법 논란에 대해서도 "흥행이 잘 안 되는 영화를 계속 편성하는 것은 극장과 제작사, 배급사 모두에게 득이 안 된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개봉 초기에 흥행력을 보인 영화도 교차상영으로 내몰리는 현실은 결국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만을 편애하는 극장 측의 취향을 반증하고 있다.

영화 상영과 선택의 문제를 지금처럼 시장에 계속 맡길 것인가, 아니면 약자를 배려하는 제도적 대안을 마련할 것인가. 이제까지는 마땅한 해결책 없이 매년 같은 갈등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희문 영화진흥위원장도 "영화 상영은 영화사와 극장 사이의 계약으로 이뤄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쪽의 잘못을 따지기 힘들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 표준계약서 약관을 제정하거나 문화체육관광부가 세제지원을 하는 등의 대안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복안은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빈틈이 많은 현재의 상영 제도가 존재하는 한 작은 국내영화들은 교차상영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