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동행' 전사진작가 아리노 에이무, 이희상, 이재훈의 사제의 연 담아

1-아리노 에이무, 허실공간
2-이희상, 'In city'
3-이희상, 'In city'
4-아리노 에이무, 허실공간
아리노 에이무와 이희상, 그리고 이재훈. 세 명의 사진작가가 세대를 잇고 넘는 인연으로 모였다. 지난 1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갤러리룩스에서 열리는 <사제동행_師弟同行> 전의 사연이다. 노작가 아리노 에이무는 20년 전 일본 오사카예술대학에서 이희상 작가를 제자로 두었고, 이제 당시 스승의 나이가 된 이희상 작가를 젊은 작가 이재훈이 따르고 있다.

사제의 연은 공통된 작업 스타일로 드러난다. 세 작가의 카메라 모두 '도시'에서 눈을 떴으며, 이 근대적∙물리적 무대에서의 삶의 모습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도시에서의 삶의 주제이자 은유이며 아포리즘인 특징적 순간들을 포착해 냈다.

이런 순간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많은 방황과 고뇌의 산물이자 일관성과 집념의 축적, 작가 자신과 세계 사이에서 적절히 조율되고 견뎌낸 뷰파인더 앞에만 불쑥 스치는 운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 작가는 사진을 예술로서 성립시킨 가장 강력한 근거인 스트레이트 다큐멘터리 포토 미학의 계승자로 평가받고 있다. <사제동행> 전은 이들이 공통의 철학 혹은 태도를 주고 받으며 각자의 시공간에서 구현한 역사의 요약본인 셈이다.

아리노 에이무의 허실공간

1-이희상, 'In City'
2-이재훈, '중간자'
3-왼쪽부터 이재훈, 아리노 에이무, 이희상 작가
역사의 연원, 아리노 에이무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그는 사진작가로 입문한 7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간 '허실(虛實)공간'이라는 타이틀로 도시 연작을 작업했다. 근거지인 오사카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 유럽 주요 도시, 미국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삼았다.

왜 '허실공간'인가. "도시는 사람이 만든 공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허상(虛狀)이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조건이기 때문에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사람이 도시에서 살면 도시에 맞게 변화되게 마련이다. 시골 사람들과 다른 도시 사람들만의 특징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어로는 'Space Between Real and Unreal'이다. 일상생활은 'real'하지만 각종 사건사고, 예기치 않은 연관과 뒤엉킴 등 'unreal'한 상태가 늘 잠복한 것이 도시의 속성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의 카메라는 "허와 실이 서로 교차하고 역전하는" 경계들을 드러냈다.

그 사진들의 인상은 몽환적이면서 적확하다. 예를 들면 어느 도시의 출근길, 전형적인 회사원의 양복에 마침 건물의 창살 그림자가 드리워진 장면 같은 것. 그림자가 온몸에 새겨 넣은 가로 줄무늬는 회사원을 순식간에 도시의 수인(囚人)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 오는 날 거리에 생긴 물웅덩이에 비친 사람들의 실루엣이 행인의 발목을 잡으려는 요괴처럼 보이는 사진도 있다. 작가의 관심은 도시라는 공간이 작동하는 원리, 메커니즘을 가시화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노 에이무 작가의 최근 작업은 도시보다는 자연을 바탕으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지만, 이 역시 도시 연작과 단절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주, 혹은 확장이다.

"이를테면 도시의 100년 전,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때는 지금 이 도시가 습지, 벌판 등 다른 형태였겠지. 거기에 사람이 처음 손을 대고 발을 디딘 시점, 부분을 찍는 작업이다."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대자연 속 간단하고도 야심 찬 사람의 흔적이다. 망망한 갯벌을 밟고 간 타이어 자국이라든지, 산을 관통할 목적으로 뚫기 시작한 터널 입구 같은 것. 이는 모든 도시의 뿌리다. 그래서 이 작업들은 결국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리적이고도 기계적인, 따라서 매우 사진적인 성찰이기도 하다.

<사제동행> 전에는 아리노 에이무가 이희상을 가르쳤던 20년 전 작업을 걸었다. 유럽 도시에서의 몇몇 순간이다. "20년 전 내가 이렇게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일흔을 앞둔 노작가가 말했다.

이희상 인 시티

이희상 작가는 어느새 20년 전 스승의 나이가 되었다. "선생님이 50대에 한 작업을 다시 보니, 그가 하나의 연작을 찍기 위해 10년, 20년을 들이는 신중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지금의 아리노 에이무 작가는 또 나의 20년 후 하나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아리노 에이무 작가에 화답하여 이희상 작가도, 그를 사사한 일본 유학 시절의 작업을 전시했다. 'In City' 연작 중 일부다. 역시 도시와 사람에 주목했지만 대상의 존재감이 다르다. 아리노 에이무의 도시인들이 도시의 메커니즘의 일부로 녹아들어 있다면, 이희상의 도시인들은 도시 '생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보이는 실존적 존재들이다.

전형적인 근대식 건물에서 막 빠져나온 회사원은 건물의 당당한 위용에 비하면 고작 한 점에 불과하지만, 단지 애처롭기보다 오히려 이 거대한 삶을 견디려는 자존의 형상이다. 거리의 외벽에 비친, 바쁘게 계단을 오르는 한 남자의 그림자는 과장되어 있을지언정 기괴한 인상만은 아니다. 어떤 씩씩함, 도시에서의 삶에 적응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내면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이는 "스스로를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이희상 작가 자신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사진이 곧 인생인 작가"가 되고 싶었고, 따라서 내내 카메라와 더불어 방황하고 고뇌한 그의 '도시 생활'에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는지 모른다.

결코 감정이 앞서지 않는 사진들임에도 종종 뭉근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예를 들면, 프레임 위쪽 3분의 2쯤은 도시를 내려다보고, 아래쪽에는 천천히 걷고 있는 나이 든 커플을 담은 사진. 이기고 뽐내려는 저 도시의 욕망과, 이쪽 편 사람들의 무심함과 안정이 대비된다. 늦가을처럼 무상하면서도 애잔한 운치가 풍긴다.

자꾸 눈을 붙드는 부분은 도시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꼭 한 걸음만큼의 거리다. 깨달음이 있다. 저 세대는 평생을 저렇게 살아왔겠구나. 여기에 왼쪽 위로부터 내려와 도시의 전경을 툭툭 간질이는 듯한 갈고리 모양 나뭇가지가 절묘하다.

"고베의 한 공원이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데 중간에 걸쳐진 나뭇가지가 슬프게 느껴졌다. 이렇게 걸쳐진 구도를 좋아하진 않는데, 그 순간과는 인연이었던 것 같다. 마침 노인들이 지나갔다."

1989년작이다. 1997년 대지진으로 고베는 이전의 모습을 모두 잃었다. 사진 속 풍경도 더이상 없다. 20년 전 이희상 작가의 카메라가 도시의 무상한 운명을 예감한 사실만 이렇게 남아있을 뿐.

중간도시의 중간자, 이재훈

30대의 이재훈 작가는 재작년 석사 졸업 논문에서 아리노 에이무 작가의 '허실공간' 연작을 분석했다.

"아리노의 사진에 등장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사물들이다. 그런데도 그 작품에 일종의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떠돌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중략) 그는 외부의 모델을 더욱 허상화시킴으로써 내적인 환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은 실재가 허상으로, 허상이 실재로 탈바꿈하는 메커니즘의 기술, 혹은 장치다. 이는 아리노 에이무가 체득한 도시의 원형인 동시에, 그의 작업 자체의 방식이기도 하다. 즉 이재훈의 '허실공간' 분석은 두 가지 층위의 질문에 대한 공통의 대답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무엇인가,와 그것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이재훈 작가 세대에게는 후자가 전자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인데, 이는 전 세대에 비해 더 추상적이면서도 감각을 많이 빼앗기는 방식으로 도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허상적 속성을 실재화하는 더 일상적이고 다양해졌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유명 할리우드 스타의 동상이나 코스프레로 스스로 캐릭터화한 사람들 등 형형색색의 조형물들이 근대적 양식의 건물이나 구조물, 기념비와 나란히 도시적 삶의 경관을 구성하고 있다. 무엇을 찍어도 현대 도시의 상징이 되지만, 정작 그 기교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을 기르고 유지하기란 더 어려워졌다.

이재훈 작가가 대표작 '중간도시' 연작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상당히 배제한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그는 아예 도시의 물적 토대부터 샅샅이 훑기로 작정했다. 전국 곳곳에 맥락 없이 서 있는 마릴린 몬로의 동상을 찍는가 하면,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군 복장을 입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 만화에서의 복장을 한 퍼포머들을 담는다. 이 피사체들의 키치함이 현대 도시에서의 삶이라는 복잡한 과정에 진입하는 열쇠라는 듯.

<사제동행> 전에는 '중간도시' 연작을 진행하는 동시에 작업한 '중간자' 연작을 전시했다. 분명히 도시 사람들인데, 넥타이 매고 시간에 쫓기는 전형적인 도시인 상에서는 살짝 비껴난 것 같은 '경계인'들의 모습이다.

무자비한 도시 메커니즘에 완전히 잠식당하지는 않았으되, 전위적이기보다는 틈틈이 자기 식대로 도시를 즐기는 수준의 '인종'에 대한 보고서랄까. 혹은 꼭 이 정도의 행동방식이 '중간도시'의 정곡이라는 주장이랄까.

아리노 에이무, 이희상, 이재훈 작가 인터뷰

장유유서에 따르면 <사제동행> 전은 아리노 에이무, 이희상, 이재훈 순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동선은 아리노 에이무, 이재훈, 이희상 순으로 짜여 있다. 막내 이재훈이 중심에 있도록 하려는 스승들의 배려다. 사제간 면면한 훈기는 전시 제목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지난 18일 전시 오프닝에서 세 작가를 만났다.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아리노 에이무 이런 기획으로 모이게 되어 감명 깊다. 전시를 통해 세 작가를 잇는 끈을 감지해 준다면 고맙겠다.

이희상 외국 작가들은 자신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꼭 밝히곤 하는데 한국 작가들은 그런 점이 부족하다. 이번 전시가 작가들 간 영향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재훈 타임머신을 타고 50대, 70대의 나를 미리 보는 기회 같다.

#20년 전 이희상 작가는 어떤 제자였는지.

아리노 에이무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진은, 찍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희상은 찍는 것을 잘 시작한 작가였다. 기본이 충실하단 뜻이다. 유학은 학교 생활과 생활비 벌기, 사진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이 모두를 잘 성립시킨 학생이었다.

#그럼 반대로 아리노 에이무 작가는 어떤 스승이었나.

이희상 전시를 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작업한 프린트들을 가져가면 끄덕끄덕하면서 "처음엔 다 이 정도 하지, 됐네" 하셨다. 그러면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혀서 "이건 아니구나, 누구나 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끝내 찾아낼 때까지 작업하게 하는 스승이었다.

이재훈 이희상 선생님도 나에게 그랬다.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적어도 3번 이상을 작업하게 하셨다.

아리노 에이무 그렇게 매번 도전하고 몰두하게 만든 게 지금까지 이희상 작가에게 이어져 오는 것 같다.

# 엄격한 교수법 외에 아리노 에이무 작가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희상 작업량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로 계산한 것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사진에 투자하는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셨다. 아리노 에이무 작가의 집 곳곳에는 사진이 붙어 있다. 늘 보고 생각하기 위함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 지금은 300점 정도 붙여 놓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사진을 본다.

# 이재훈 작가는 아리노 에이무 작가를 어떻게 접했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이재훈 홍익대 대학원에 재학하며 이희상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 작업 '중간도시'는 도시를 훑으며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이 느껴지는 찰나를 찍는 것인데, 그 첫걸음을 내딛을 때 아리노 에이무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

# 아리노 에이무 작가가 이재훈 작가의 작업을 평가한다면.

아리노 에이무 이희상 작가도 마찬가지인데, 불필요한 감정 표출이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것이다. 여기에 주관을 넣을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성을 지향하는 작업인 것 같다. 또 그 방향성이 곧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현대인의 성향을 표현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 이런 기획이 또 있다면 참여할 것인가.

아리노 에이무 원래 그룹전을 잘 안 하는 타입이지만, 이런 전시는 나에게도 20년 전 살아 있었고 이희상 작가를 가르쳤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다. 한국 제자가 30명 정도 있는데, 그들이 요청한다면 교육자로서 최대한 돕겠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