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양지 초대전] 독특한 필치, 마음으로 그린 산수에 길 내고 혼 담아

한국 고고학을 개척한 고 김원룡 전 서울대교수는 1980년 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고 마냥 흐믓해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감흥은 이렇다.

"나는 그의 전시회에서 산수 한 폭을 샀다. 그리고 관악산 연구실로 들고 와 혼자 즐거워했다. 희고 넓은 여백과 강한 필선, 그리고 맑은 채색이 만들어 내는 화면은 청계(淸溪)의 백석(白石)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하고 그러면서 명주실처럼 섬세하다. 이 경지는 기(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사사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타고난 사람 자체의 발로(發露)일 것이다."

미술사학자이자 고고학의 석학인 김 전 교수가 극찬한 작가는 동양화가 탁양지다. 김 전 교수는 비록 미술평론가는 아니지만 탁 화가의 작품 세계의 특징과 핵심을 정확하게 잡아낸 셈이다. 이는 원로 미술평론가인 이경성 석남문화재단 이사장의 탁 화가에 대한 평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서 추론된다.

"그의 선(線)은 속도를 머금고 강한 필력이 되어서 화면에 생명감을 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대담한 대비적인 색조는 민화나 단청 같은데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대담한 색체 세계이다.(중략) 그의 산수화는 전혀 주관적인 것으로 형태와 선과 색채가 모두 자기의 체질을 걸러서 나오는 탁양지 자신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화면의 조형적인 효과를 위하여 대담한 설정을 서슴지 않고 여백의 공간에 깊은 시각의 철학을 준다."

탁양지의 산수화는 지필묵을 중심으로 운용하고 화면의 형식에서 다분히 전통적인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작가 특유의 정적인 함축미와 담백하면서도 대담한 색체는 여느 산수화와 구별된다. 무엇보다 산수를 그리돼 자연속에 있는 진경산수가 아니라 자기가 보고 느낀 많은 산수 속에서 마음에 남는 요소만을 골라서 그린 산수라는 그린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1-반야심경 2009 2-해향(海鄕) 2009 3-원빈(元牝) 2009 4-원빈(元牝) 2009
이렇게 마음으로 그려낸 주관적인 산수화는 그래서 작가의 세계관, 심미관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탁양지의 산수화는 우선 간결하고 필치가 단호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김상철 미술평론가는 이를 중국 송(宋) 휘종(徽宗)의 수금체(瘦金體)에 비유한다."운필은 힘 있고 날카로우며 필도(筆道)가 마르고 가늘며 빠르고 강하지만 그 속에는 부드럽고 호방함이 내재되어 있다."

실제 탁 화가의 필선에는 기교적인 변화나 섬세하고 재치 있는 운용은 보이지 않는다. 필묵의 기본적인 농담이나 독특한 필치와 여백의 운용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아마 미술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어쩌면 병행해서 철학을 공부한 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

탁양지 화가는 동양철학, 그 중에서도 노장(老莊) 철학에 심취했고 1980년대에는 고 함석헌 선생에게서 철학 뿐 아니라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큰 공부를 했다고 말한다.

특히 함석헌 선생이 강의 때마다 강조하던 '속알(알맹이)'은 아직도 울림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필선이 간결하고 구도가 함축적인 것, 그리고 노장이나 불경의 구절이 작품의 요소로 등장하는 것 등은 그러한 철학적 사유에 바탕한 것으로 해석된다.

탁 화가가 재학(홍익대 동양화과) 중 접한 천경자, 월전 장우성, 청전 이상범 등 당대 최고의 작가이자 교수의 가르침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천경자 선생님에게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월전 선생님에게선 선비정신을, 청전 선생님으로부터는 예술 전반에 대한 것을 배웠어요. 큰 복을 받은 셈이죠."

탁 화가의 작품에서 보이는 격조있는 심미안 기법은 그만의 예술양식, 동양정신에 기저한 사유와 철학, 문인화 정신에 연결돼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자유분방한 미학과 평면 구성 혹은 컴포지션과 현대적 감각의 개성은 탁 화가만의 색깔이다.

송나라 곽약허는 <도화견문지서론(圖畵見聞志緖論)>에서 창작의 표준 규범에 대해 '그림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할 부분이 있고 스승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 배울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작가의 개성적인 것이 되고 그림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탁 화가 작품에서 보이는 독특한 개성에 비춰 이것이 어떻게 발현될 지 주목된다.

탁 화가 작품의 또다른 특징은 색채다. 전체적인 담백함에다 특히 블루(Blue) 칼라는 탁 화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진다. 작품 중엔 바다는 물론, 산, 소나무까지 블루다. 작가의 고향인 경남 통영 바다가 어릴적부터 푸른 꿈을 심어준 소치이다.

탁 화가의 통영 바다를, 그 푸른 꿈을 오는 25일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에 떠 있는, 또는 바다와 마주한 산, 집, 나무, 사람은 본래 작품 속 모습보다 더 함축돼 있다. 고향을 향한 마음따라 주관성이 강화되면서 바닷물이 스쳐간 마모의 흔적과도 같다. 고향의 서정과 감성에 충실한 작가의 작업은 보다 자유롭고 여유롭게 표현돼 있다. 개성적인 동양화를 보여 온 탁 화가의 이러한 변화는 내밀한 사색과 관조의 산물로 원숙해져가는 삶의 또다른 모습이다.

대담한 발묵과 과감한 색채로 화면을 보다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면서도 품격과 운치가 여전한 탁 화가의 산수를 내달 1일까지 마음에 담을 수 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