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치료 고안자 수 제닝스 내한 특별 워크숍 열어

대학로의 한 연습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서로에게 포개며 아이처럼 즐거워한다. 근심 하나없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단체로 'OTL'을 형상화한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누군가의 입에서 "OK, STOP" 구령이 떨어진다. 그가 이번에는 이들에게 괴물이 될 것을 지시하며 "GO"를 외치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괴물이 된다.

적지 않은 나이가 분명해 보였지만 그런 자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기라도 하듯, 괴성을 지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연습실을 휘젓고 다닌다. 그 중 한 명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기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순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괴물처럼' 이쪽을 노려봤다. 잠시 후 다시 "STOP" 지시가 떨어지자 일군의 괴물들은 얌전히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연습실에 모인 성인들을 때론 아이처럼, 때론 괴물로 만드는 이 사람은 영국 연극치료협회 초대 회장인 수 제닝스다. 영국의 대표적인 1세대 연극치료사인 수 제닝스는 연극치료의 고안자이자 연극치료 발전의 산 증인이다. 1970년대에 영국 연극치료협회를 설립한 수 제닝스는 이후 세계 각국을 돌며 공연과 워크숍을 하고 있다.

이날 모습은 한국연극치료협회가 그를 초청해 개최한 연극치료 특별 워크숍의 한 장면. 그는 내한하자마자 숙명여대에서 연극치료사를 위해 심화 워크숍을 열고, 17일부터 3일간은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1연습실에서 일반인까지 포함한 워크숍을 이어갔다.

일반에 알려진 연극치료의 모습은 아직도 '연극을 통한 치료'이다. 동어반복처럼 들리지만 이는 연극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다. 치료를 요하는 사람들이 각자 한 배역을 맡아 연극에 참여하거나 그런 연극을 보면서 스스로의 상태를 인지하고 조금씩 치유해가는 모습이 아직까지는 연극치료에 대한 인식이다.

하지만 연극은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날 워크숍에 참여한 한국연극치료협회 박미리 회장은 "연극이 우리 일상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우리 삶을 재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생활 속에서 연극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가령 어릴 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꿉놀이를 통해 가상의 존재를 '연기'하는 연극을 경험한다는 것.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내며 그것을 보고 즐기는 것도 연극행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수 제닝스가 함께한 워크숍은 이처럼 연극이 인간의 발달과정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온몸을 움직여 성인이 된 후 못해 본 '몸놀이' 등을 하는가 하면, 커다란 백지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신문지를 이용해 하나의 주제를 나름대로 표현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를 차용해 인물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시간도 가졌다. 언뜻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일련의 다양한 신체 경험과 그림 그리기, 만들기, 역할 놀이 등에는 몸을 통한 표현인 '체현', 외부 대상을 통해 표현하는 '투사와 역할'이 고루 담겨 있었다.

제닝스는 이를 EPR(체현 Embodiment-투사 Projection-역할 Role) 모델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EPR을 "태어나면서부터 7살 무렵까지 극적 놀이의 발달을 독특하게 구획하는 발달적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한다. 갓난아기 시절, 엄마와의 접촉에서 시작되는 '자기'라는 의식이 점차 외부 대상을 이용하거나 자신이 다른 역할을 함으로써 발달해가는 과정을 3개의 단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워크숍에서 제닝스는 다시 한 번 '괴물'이라는 주제로 참가자들에게 그림을 그리고 동작을 하게 했다. 저마다 생각하는 괴물의 모습이 잠시 후 완성됐다. 어떤 괴물은 어린 아이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또 어떤 괴물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다. 다른 괴물은 괴물이라고 보기 어려운 귀여운 모습을 가진 것도 있었다.

잠시 후 제닝스는 참가자들에게 괴물을 그릴 때 떠오른 심상이 그림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자유롭게 말하도록 했다. 도화지 밖으로 삐져나온 거대한 괴물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한 참가자는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 '조금만 움직여도 마을이 폐허가 되는 거대 괴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평소 내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뭘 자꾸 떨어뜨리거나 부수는 민폐성 행동으로 주위로부터 힐난을 받곤 한다"고 고백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처럼 한 가지 소재를 정해 그림을 그려도 평소 자신이 보고 듣고 느껴온 경험들이 각자 다르게 투영된다는 것이 제닝스의 투사 기법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전날 있었던 전문 치료사들과의 특별 워크숍에서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연극치료로 진행됐다. 연극치료는 이야기에서 출발해 이야기로 끝난다는 말이 있는 만큼 이 기법은 중요한 기법이다.

가령 그리스 신화의 헤파이스토스 신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의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각각의 대상자에게 맞는 이야기 구조를 찾아 그것을 극화하여 체험하는 과정에서 참가자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행동의 동기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 연극치료는 비단 정신질환을 앓거나 발달지체가 있는 아이들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랜 기간 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한 미취업자, 계속되는 야근에 피로에 찌든 직장인, 인터넷 중독에 걸린 학생, 작은 키 때문에 '루저'라는 조롱을 받아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들까지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다양하고 심화되고 있다.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남의 장단에 맞춰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연극치료는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되돌려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 중 하나다. 수 제닝스의 이번 워크숍은 그런 연극치료의 효용성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