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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사가 대중문화를 호령한 까닭은

■ 대중문화읽기
싸울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여전사 신드롬' 만들어
  • (위) 영화 '미녀 삼총사' (아래) 영화 '킬빌'의 더 브라이드
<툼 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나 <킬 빌>의 우마 서먼 같은 헐리웃 초특급 여전사 못지 않은 <아이리스>의 여전사 김선화(김소연)의 맹활약이 눈부시다.

가장 보수적인 매체라고 할 수 있는 텔레비전에서 저토록 화끈한 여성 액션 히어로가 나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린 셈이다. 그녀를 보며 대중문화에서 '여전사의 역사' 또한 만만치 않은 여정을 걸어왔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성의 액션 자체가 노골적으로 터부시 되던 1960, 70년대를 지나왔고, 제임스 본드 옆에서 콜라병 같은 몸매를 자랑하며 정말 '꽃처럼' 아름답게 서 있던 본드걸의 시대를 거쳐 <에어리언>의 시고니 위버,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턴, <니키타>의 안느 빠릴로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기억할 만한 진정한 여전사의 완성된 모델을 갖게 되었다.

남성들 못지 않은 통쾌한 액션과 여성 특유의 따스한 직관이 합쳐진 이 아마존의 후예들은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고 새로운 여성성의 이상형으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를 주름잡은 여전사들의 특징은 그들이 각자의 절박한 투쟁을 위해 여성성의 많은 부분을 포기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으로 보이기 위해 아름다운 의상이나 화려한 메이크업 같은 여성의 초보적 특권을 포기했다.

  • (좌) 영화 '매트릭스'의 트리니티 (중) 드라마 '아이리스'의 김선화 (우) 드라마 '다모'의 채옥
머리를 삭발하고 죄수복을 걸치거나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지저분한 러닝셔츠 한 장 달랑 걸친 시고니 위버의 터프한 모습은 '여배우'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먼, 그야말로 살벌한 여전사형 이미지였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헐리웃 여전사들의 새로운 무기는 '팜므 파탈형 여전사'라는 변형된 이미지였다. 그들은 현란한 액션만으로도 모자라 엄청난 유혹의 에너지까지 발산함으로써 어쩌면 본드걸과 제임스 본드를 합체시킨 양성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툼 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와 <킬 빌>의 우마서먼, <미녀 삼총사>의 섹시 폭탄(?) 카메론 디아즈, 드류 배리모어, 루시리우가 대표적인 캐릭터다.

그들은 총을 쏘거나 현란한 액션을 선보일 때조차 '어떻게 하면 더더욱 섹시하게 보일까'를 치밀하게 연구한 듯한 포즈와 분장으로 남성팬과 여성팬 모두를 열광시킨다. 이들 모두 엄청난 흥행 파워를 과시했지만 내 눈에 비친 헐리웃 여전사 중 최고는 <매트릭스>의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였다.

그녀는 섹시한 외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수정처럼 차갑고 과묵한 이미지 때문에 더욱 빛나는 독특한 여전사였다. 사랑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던 무뚝뚝한 그녀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죽어가는 네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아닐까.

그녀는 부담스럽게 지나치게 여성적인(?) 육체를 스크린에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절제된 액션으로 더욱 오래 기억에 남았다. 트리니티는 그 멋진 가죽재킷 속에 꽁꽁 숨겨진 듯한 내밀한 여성성으로 더욱 신비롭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레옹>의 마틸다 역시 잊을 수 없는 여전사 캐릭터다. 귀여운 물감총으로 완벽한 포즈를 취하며 그 조그만 몸으로 '첫번째 미션'을 완수하던 꼬마 킬러 마틸다. 그녀는 사실 그토록 꿈꾸던 '여전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아마존의 여전사적 '끼'를 다분히 지닌 이 겁 없고 철 없는 미성년자 여전사는 그녀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력' 때문에(결국 이 열두살 소녀는 아무도 죽이지 못하니까) 더욱 가슴시린 멜로의 여전사로 기억되었다.

<와호장룡>의 소룡(장쯔이)과 수련(양자경)은 또 어떤가. 그녀들은 단지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의 액션이 아니라 여성들끼리의 액션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했다.

그녀들의 무술은 또한 서양의 액션과 동양의 무협의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는 아름다운 영상미를 구현했다. 수련의 칼끝이 겨누는 것은 소룡의 목숨이 아니라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과 공명심이었고, 수련이 소룡에게 바란 것은 '내가 너를 쓰러뜨리는 승리'가 아니라 '네가 진정 네 자신으로 사는 것'이었다.

수련의 무협은 상대의 제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를 궁극적 목표로 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기술이었다.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엄청난 제작비와 문화적 인프라는 구축되지 않았지만 이제 한국에도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여성 액션 히어로가 곧 나오지 않을까. 아직까지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가장 아리따운 한국형 여전사는 드라마 <다모>의 채옥(하지원)이다.

왕후장상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천부적으로 화려한 운명을 타고난 저 대단한 헐리웃 여전사들과 달리 조선 여형사 다모의 신분은 비천하기 이를 데 없고 그녀의 미션 또한 한 나라나 지구를 구하는 것 같은 대단한 임무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노비와 다를 바 없는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도 항상 자신의 무술이 '어떻게 쓰여야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다. 그녀의 무술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내기 위한 '마음의 표정'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아이리스>의 여전사 김선화는 엄청나게 좋은 환경(?)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품으로 도배한 그녀의 비주얼은 멋지지만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긴 하다.

어느때보다도 여전사의 외모는 화려해지고 액션은 정교해져가지만, 어떻게 보면 더욱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여전사의 이미지가 횡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싸우고 싶지만 싸울 수 없는' 이 견고한 세상의 장벽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 존 스타인벡은 '투우'를 향해 쓴소리를 남긴 적이 있다. 투우는 용감하지도 못하면서 용감해지고 싶어하는 남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현대인의 여전사 신드롬도 그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싸우고 싶어 미칠 것 같지만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 그 안에 도사린 귀차니즘과 먹고사니즘. 점점 비현실적으로 완벽해지는 여전사의 화려한 액션은 현실을 향한 우리의 무력감과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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