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늘이>제주 신화 현대적으로 재해석…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물어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 한방을 노리며 와신상담하는 고시원 인생, 힘든 현실을 못견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공연장에서마저 이런 현실의 무거움과 마주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관객은 두통을 얻으려고 표를 사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재현 이후를 찾는 무대예술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 '88만 원 세대'의 괴로움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책과 연극을 통해 충분히 익숙해졌다. 그럼 그 다음은? '변하지 않는 사회'와 '힘든 우리' 사이에 있는 '제3의 길'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의 문제다.

이때 창작자의 상상력은 새로운 틀을 생각하게 된다. 심각한 연극도, 신나는 뮤지컬도 아닌 다른 장르를 통한 우리 사회의 반영이 그것이다. 익숙한 주제와 무대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고 낯선 재미를 줄 수 있는 장르. 그래서 신화적 모티프로 시사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국악뮤지컬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국악뮤지컬 자체는 국악의 대중화 차원에서 이미 익숙한 장르가 됐다. 하지만 국악뮤지컬로 풀어내는 '88만 원 세대'의 이야기는 낯선 조합이다. 지난 15일부터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국악뮤지컬 <오늘, 오늘이>는 고수와 명창의 전형 대신 연기와 춤을 보여주는 젊은 소리꾼들이 등장해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아픔과 희망을 특색있게 전하고 있다. <시간을 파는 남자>, <판소리, 애플그린을 먹다> 등 참신하고 감각적인 작품으로 차세대 국악을 이끌어왔던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의 새 작품이다.

그동안 무게를 잡고 심각하게 얘기됐던 주제는 배우들의 판소리로 전달되며 한결 가벼워지고 여유마저 생겼다. 전통한복도, 개량한복도 아닌 평상복을 입은 배우들의 구성진 판소리와 율동은 현대극과 국악이 가진 한계를 상호보완하며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극중 캐릭터들의 면면을 보면 현대극보다는 전통극이나 아동극의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캐릭터의 이름도 '얼짱이', '고시남', '걱정이', '오늘이' 등이다. 아니나다를까, '오늘이'는 제주도 무속신화 '원천강 본풀이'의 주인공인 그 '오늘이'다. 신화의 섬인 제주도에서 전승되던 원천강본풀이 신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모두 모여 있는 원천강을 주관하는 신의 이야기로, <오늘, 오늘이>는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원천강'이라는 설정은 '원천강 고시원'으로 각색되고 등장인물도 연예인 지망생, 고시생, 고시원 총무 등 현실 속 암울한 캐릭터들로 대체됐다. 희망 없는 현실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은 대개 영웅 캐릭터나 판타지에 기대는 것이지만, 여기서 '오늘이'의 역할은 전지전능의 해결사가 아닌, 캐릭터들과 관객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고도'의 역할이다. 결국 <오늘, 오늘이>는 '세상을 바꾸자'고 권유하는 선동이나 '지금의 세상은 잘못됐다'고 하는 비판이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묻는 자기성찰에 대한 작품인 것이다.

그동안 국악뮤지컬은 더 친숙한 국악을 모토로 어린이극이나 고전 원작을 각색하는 양상으로만 창작되어 왔다. 때문에 관객층도 일부에 한정될 수밖에 없던 한계가 있었다. 이와 함께 퓨전국악 공연의 전형화된 콘셉트는 그 내용면에서 참신함의 부재를 지적받아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면서도 국악 원래의 매력을 보여주는 현대적 공연의 시도는 아직까지 많지 않았다.

<오늘, 오늘이>는 이런 국악 공연 내부의 고민과 나름의 해법을 담은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어린이용도, 고전을 그대로 각색한 것도 아니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이끌려 국악 본래의 특성을 잃지도 않았다. <오늘, 오늘이>의 의미는 장르 사이의 균형과 새로운 분야의 개척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방점은 '오늘이'다. 시사성 있는 주제를 택했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동력은 '오늘이'라는 우리 고유의 캐릭터다. 힘든 현실을 외부의 현상 비판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성찰과 반성으로 이끄는 전개는 다분히 전통적 방식이다. 타루의 고강민 기획실장은 "이제까지는 의도치 않게 서양문화나 소설에서 소재를 차용하고 악기 구성도 서양악기들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번 작품은 '오늘이'와 같은 한국적 소재와 한국 악기들로 구성해 보다 더 한국적인 국악뮤지컬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동안 '오늘이'는 애니메이션 <오늘이>(감독 이성강), 아동극 <춘하추동, 오늘이>(극단 신화세상), 발레 <시간의 꽃, 오늘>(김순정 발레단), 어린이 음악극 <오늘이>(국립국악원) 등 다양한 장르에서 끊임없이 재탄생해왔다. 그만큼 '오늘이'라는 캐릭터는 고전적 특수성을 넘어 현대 보편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강민 실장은 "각각의 인물들이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보다 성숙한 작품이라는 점이 이제까지의 '오늘이'와는 다른 점이다"라고 차별점을 설명한다.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서양의 양 극단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국악뮤지컬이 사회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 <오늘, 오늘이>가 처음은 아니다. 타루는 전작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도 '여유없는 현대인의 삶'을 우회적으로 풍자한 바 있다. 이번 신작 <오늘, 오늘이>의 고민은 철학적으로 진일보했다.

하지만 철학적 고민이 기존 실존연극처럼 마냥 심각하고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역시 국악이라는 도구와 뮤지컬이라는 장르 덕분이다. 작창도 기존의 고어가 아닌 현대어들로 담겨 판소리에 '대박'이나 브라운아이드걸스의 가사가 삽입되는 등 파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판소리만 하던 소리꾼들이 보여주는 '아직은 어색한' 춤들도 보는 이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개성이자 족쇄였던 국악 본래의 이미지에서 조금씩 탈피하고 있는 국악뮤지컬. 퓨전국악의 진행방향과는 다르게 판소리 차세대 명창들이 한데 뭉쳐 보여주는 새로운 국악의 의미는 남다르다. '우리 것'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억눌려 끊임없이 동어반복을 해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국악은 그것이 몸담은 사회에 눈을 돌리며 새로운 정체성 찾기를 시도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