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각의 선구자 작품세계 재조명하는 한일 공동 전시 열려

지원의 얼굴, 1967년
근대 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진지하게 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과 공동주최로 열린 이 전시는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무사시노 대학에서 전시되었고 이어 12월 21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별관에서 전시 중이다. 국내에서 대규모로 열리기는 20년 만이다.

권진규에 대한 뒤늦은 조명은 일본에서 먼저 불붙었다.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설립 80주년 기념전시 작가로, 교수들과 학생들은 만장일치로 권진규를 선정했다. 그는 이 대학에서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수학한 인연이 있었지만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쉰한 살의 나이로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자결한 그는 그동안 비운의 작가로 신화화되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정리된 작품론 하나 나오지 않아 국내에서 발간된 논문은 수십 년째 동의어를 반복하며 학문적 빈곤함에 시달려왔다. 덕분에 여러 가지 추측과 오해가 난무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세 가지 오해, 작품과 그가 남긴 메모를 통해 풀어봤다.

권진규는 나르시시스트였다?

그는 유독 많은 자소상을 남겼다. 전시장 2층의 한쪽 방은 남자 얼굴, 즉 자소상으로 가득하고 반대편 방에는 여자들의 인물상이 많아, 관람객들은 우스갯소리로 남탕과 여탕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성 인물상은 매번 모델이 바뀌지만 남성상은 자신의 얼굴을 주로 담고 있고 더구나 여성들의 모습에서도 자신의 모습과 겹친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나르시시스트였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애가 강하다기보다는 이상화된 인물의 형태가 정해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곤스케(자소상), 1967년
여성 모델들도 얼굴 골격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늘 모델을 직접 선택한 것으로 보아 취향도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델들의 얼굴은 그대로 재현되지 않았다. 동양인들임에도 작품에선 하나같이 서양인처럼 광대뼈 사이의 좌우 폭은 좁고 이마와 뒤통수까지의 길이는 길다. 그것이 권진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두상이었던 것. 이는 자소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신의 골격을 변화시켜 표현한 이상화 작업은 그대로 드러났다.

권진규는 모델을 알면 알수록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여겼다. 그 사람의 정신성까지 작품에 반영된다고 믿었던 것. 자연히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한 최고의 모델은 자기 자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은 제자나 주위 사람들이 다수 모델로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후에 유명해진 조각가다?

오랜 시간 그는 '비운의 조각가'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조각가의 죽음은 의문에 휩싸였다.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다'라는 글만 남겨 의문은 증폭됐다. '가난이다', '제자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이미 죽음을 내면화했다' 등 추측만 난무할 뿐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메모를 많이 남긴 작가 중 하나다. 1960년대 적은 수첩을 보면 전시회 기획을 적거나 어떤 작업을 했는지, 작품을 수복한 방식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제목 역시 대부분 직접 지었는데, 이번 전시에도 따옴표가 적힌 것은 기록을 확인해 옮겨놓은 것이다.

재회, 1967년
기록은 비단 그의 수첩과 메모에만 있지 않다. 그가 생전에도 충분히 유명세를 떨치던 조각가였다는 사실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전시할 때마다, 그 준비 과정이나 전시회 소식은 언론매체를 통해 다뤄졌고 전시회에 비치했던 방명록에는 당대의 많은 문화예술인의 사인이 적혀 있다. 1960년-1970년대 화단의 관심이 동양화였고 그다음이 서양화, 그리고 조각은 국전 등 수상자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생전에 소외받던 예술가는 아니었다.

권진규는 음울한 천재였다?

권진규는 우리에게 '지원의 얼굴'로 잘 알려졌다. 무표정하고 좌우대칭이 뚜렷한 얼굴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 작품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작품 세계는 오히려 함몰된 바 있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인물상에서 표현되는 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가 가진 해학성이 얼마나 빼어났는지가 드러난다.

다양한 주제와 재료의 실험을 보면, 그는 무척 즐기면서 작업해왔음을 알 수 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잘 드러난 부조 작품에는 선의 리듬감, 색채의 사용, 조형을 만드는 손의 느낌 등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또 그는 말, 소, 고양이 등 여러 동물의 형태를 수묵드로잉이나 환조, 부조에 걸쳐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말의 다양한 몸놀림과 표정 등을 통한 극적이고 직접적인 감정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마두, 1969년
한일 공동전시 뒷이야기 - 작품 사수하기

권진규가 즐겨 사용했던 방식은 '테라코타'다. 흙으로 빚어서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내는 방식이다. 1960년대, '건칠'을 사용하기 전까지 줄곧 테라코타 방식을 고수했다. 진시황 토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고대 부장품 중에서 지속력이 매우 강한 방식으로 알려졌다.

권진규 역시 그런 이유로 이 방식을 사용했지만 문제는 완벽하게 구워지지 않았을 경우다. 한일 공동전시를 하면서 운송 방법에 대해 몇 달을 고민하고 6번 이상을 보존수복팀의 전문가들이 체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문화재 옮기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결국 비행기로 이송했던 작품들은 한번 움직일 때마다 전문가들의 확인을 거쳤다. 소장가 앞에서 작품을 포장할 때 한번, 일본으로 이송하기 전에 한번, 일본에 도착해 포장을 열면서 한번, 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 까지 이 과정을 반복했다.

원래 파손되었던 테라코타 작품 중 1/3은 보존수복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보존이 잘 되어 테라코타의 초기 색감과 질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작품들도 이번에 전시됐다. 40년 이상 미공개되었던 <곤스케>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소장하는 <애자>, 그리고 비구니 작품 등이다.

도움말 : 국립현대미술관 류지연 학예사

코메디, 1967년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