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의 시대>전8명의 작가와 8명의 연구자 참여 얼룩진 한국사회 성찰

정윤석, non fiction diary, 2009
"타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범죄를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 인문지리학의 오랜 연구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포를 자신이 사는 세계 밖, 그래서 낯선 곳으로 밀어내왔는가를 이야기해준다.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의 범인은 언제나 마을을 지켜주는 울타리 너머 숲 어딘가에 있는 악의 존재임이 틀림없어야 한다." -박상우

전시장 중앙의 거대한 서울 지도가 관객을 맞는다. 빨강, 파랑, 초록... 색색의 스티커가 곳곳에 붙어 있다. 몰려 있는 동네도 있고, 띄엄띄엄한 동네도 있지만 어쨌든 전역에 수두룩하다. 벽에는 거리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각각의 사진에도 빨강, 파랑, 초록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전형적인 골목이기도 하고, 왁자지껄한 아이들 틈이기도 하고, 옷가게 쇼윈도 안이기도 하다.

여기가 어딘가.

일상인 동시에 범죄 현장이다. 스티커마다 주인공이 있다.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 등이다. 무심한 스티커들이 우리가 언젠가 지나친 곳마다 폭력과 상처의 기억이 서려 있었다고 일러준다. <죄악의 시대> 전을 여는 강홍구 작가의 작품이다. 차마 제목은 붙이지 못했다.

31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대안공간루프에서 열리는 <죄악의 시대>는 나날이 흉포한 범죄가 벌어지고, 아귀다툼으로 얼룩진 한국사회를 성찰하려는 전시다. 8명의 작가와 8명의 연구자가 참여했다. 작가들은 다양한 작업으로, 연구자는 에세이로 시대의 증상을 드러냈다.

노순택, 그날의 남일당, 2009
정윤석 작가는 재개발이 진행되는 아파트 단지에서 발견했다는 가정 하에 일기장을 내놓았다.('non fiction diary') K라는 사람이 살인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그는 "세상에 큰 불만은 없지만 필요 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너무 많으며, 이들을 높은 곳으로 선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밝힌다. 작가는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고 붙잡힌 K에게서는 다량의 증거물이 압수된다. 하지만 범죄의 정황과 연관된 것이 아닌 "90년대 보안사 민간사찰부터 2000년대 용산참사까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들에 대한 수집물이다.

K는 살인범이 아닌 과대망상증 환자로 결론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모아온 이 "다층적이고 정리되지 않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수많은 결들"까지 혼자만의 환상은 아니다. 작가는 거기에서 "실제 우리가 그동안 꿈꿔 왔던 공통의 환상, 그로 인해 우리가 묵인한 '여죄'"를 본다. 얼마나 많은 실제 살인이 살인 아닌 것으로 처리되었으며, 그 와중에 생겨난 분노는 또 어떤 말과 마음의 살인을 불러 왔을까.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데 한번이라도 그 점을 차분히 되짚은 적이 있었나"(기획자 김상우)라는 의문이 전시의 출발점이었다. 유난히 사회적 비극이 많았던 작년에도 위로와 애도는 있었지만, 성찰은 드물었다. 설명되지 못한 충격과 불안은 탐욕스럽고 발 빠른 이데올로그들에 휘둘리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부로 무마되어서는 안되었다. 의문은 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민되기 위해서 생겨나는 것. 비극적 사건은 사회가 병들었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것을 직시해, 그것을 넘어 보아야 하는 공동의 징표다. 이는 기획자인 김상우가 '한국의 범죄 현장'이었던 전시의 가제목을 '죄악의 시대'로 바꾼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시장의 범죄 현장들은 현실이면서도 메타포다. 용산참사를 둘러싼 사건들에서 시각적 상징들을 포착한 노순택 작가의 '그날의 남일당' 연작이 그 예다. 용역 업체 직원의 굳센 팔만으로 철거 직전의 긴장과 대치를 연상시킨다.

박정원, 친구의 얼굴, 2009
이성희 작가는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현장검증을 하는 장면을 촬영한 보도 사진을 선별해 전시했다.('scene') 이 대형 파노라마사진에서 주인공은 범인이 아니다. 그 맥락이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 동네 아이들부터 피해자 가족, 전국에 중계하는 카메라들, 두려움과 혐오감, 분노와 호기심이 뒤엉킨 시선들이다. 죄악을 둘러싼 대중적 분위기다.

이런 '구경'이 올바른 것일까. 사진이 묻는다. 성찰은, 자신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기획자가 쓴 에세이의 한 구절이 일침을 놓는다.

"오늘날 매체는 저옛날 무당처럼 제의를 주재하며, 범죄를 오락처럼 연출한다. 범죄를 일으켰던 인과관계는 희석되고, 일회적 볼거리만 양산될 수밖에. 오락과 도덕은 그렇게 통일되는 것이다."


이성희, scene#1, 2009
이재헌, 운명, 2009
노충현, 마네킹, 2009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