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리랑, 45년에 묻다>전

박찬경의 '독일로 간 사람들'
16일부터 열리는 <독일 아리랑, 45년에 묻다> 전은 지난해까지 진행된 파독광부 복지사업을 마무리한다. 60~70년대 당시의 삶을 기록한 자료와 파독광부에 대한 미술 작업을 전시하고,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파독광부백서 2009>와 다큐멘터리영화를 공개한다.

하지만 이는 파독광부 복지사업의 성과를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사업 배경과 진행 과정의 본말전도를 짚고 알리는 것이 진의다.

핵심은 파독광부 복지사업이 정부 주도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재원의 대부분은 파독광부에게 벌써 지급되었어야 하는 적립금. 독일 정부가 인력 파견의 대가로 한국 정부에 지불했지만, 당사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은 연금 18억 원이다. 사업의 주체도 독일과 한국의 파독광부 모임인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와 한국파독광부연합회가 기반이 된 한국파독광부총연합이다.

한 파독광부의 말마따나 "동료들의 피와 땀"으로 자신의 역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이들의 현실인 셈이다. 한국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무관심하다. 작년 <파독광부 45년사>를 발간한 재독한인글뤽아우프의 성규환 회장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현실이 슬퍼 스스로 기록을 남기기 위해 70대 노인들이 나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샐러드TV의 가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은 이런 '비극'이 씁쓸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는 객관화, 평가의 의미도 있는 것인데 그것까지 당사자들이 할 수는 없지 않나."

작가이기도 한 는 이번 전시를 위해 자신의 2000년작 <독일의 기억>을 재작업했다. 독일에 체류한 당시 5명의 재독 파독광부를 인터뷰한 영상을 재생하고, 잊힌 파독광부들의 이름을 벽에 빼곡히 적은 설치 작품이다. 는 이 작품을 통해 "현재까지 생생한 역사로 살아 있는 이들을 서둘러 우리의 기억 저장 창고에서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묻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찬경 작가도 참여했다. 재독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담아 2003년 출간한 사진에세이집 <독일로 간 사람들>의 내용을 전시한다. 박찬경 작가는 당시 "작업을 위해 이런저런 조사를 하다가, 파독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제대로 된 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고, 수치심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파독광부를 재조명하는 의의는 우선 그들이 한국 현대사에 기여한 바를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이지만 단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개인사가 곧 한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파독 광부의 존재와 경험은 한국사회 공통의 교훈이자 자산이기도 하다.

박찬경 작가는 "파독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존경은, 한국 경제 건설의 신화로만 흡수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상실증과 무지,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한 경고로 이어져야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그들만의 과거를 우리의 진행형 현재로 바꾸는 것이 파독광부 복지사업의 진정한, 열린 마무리다.

<독일 아리랑, 45년에 묻다> 전은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위치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2월1일까지 진행된 후, 2월5일부터 11일까지 독일 파독광부기념회관·한인문화회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1월29일에는 주한독일문화원에서 '파독광부 역사 평가와 전망'(가제) 세미나가 열린다.

'독일 아리랑, 45년에 묻다' 전에 전시되는 파독 광부 사진
"파독광부들이 오죽하면 스스로 나섰겠나"

샐러드TV

파독광부는 이를테면, 국가가 해외에 파견한 이주노동자다. 지금 한국사회 내 이주민들처럼, 그들도 살았을 것이다. 다문화를 컨셉트로 한 인터넷방송인 샐러드TV 는 "파독광부 문제는 한국이 내부의 이주민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2000년 <독일의 기억> 작 당시 만난 재독 파독광부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어하던가.

'향수병'에 대해서다. 이주민들이 절대 하지 못하는 말 중 하나가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다. 설령 평생 고향에 가지 못할 것이 명백해도 그렇다. 단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기보다 그만큼 이주한 사회에서의 고립감이 크다는 뜻이다. 그리고 파독광부들은 자신들을 잊은 한국사회에 섭섭한 감정도 드러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은 무엇이었나.

박경주의 '독일의 기억'
간 이식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60대 중반이었는데 병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 경우였다. 파독광부 중에는 광산 근무의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은 사람이 많다. 진폐증은 물론이고, 다양한 합병증을 앓는다. 당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야간 근무를 하는 등, 몸을 혹사한 탓이다.

파독 광부 복지사업은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사회가 하지 못하고 파독광부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씁쓸하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제3자의 시선이 결여될 수밖에 없지 않나. 또 이렇게 일회적인 정리 작업으로 끝나는 것도 아쉽다. 만약 사업비로 재단을 세웠다면, 앞으로 꾸준히 후속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독광부 사이에서는 재단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나.

그들도 사정상 최근까지는 연합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작년에야 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재단을 만들 구심점이 없었던 셈이다.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파독 재독 한인들은 다른 사회의 한인들과 좀 다르다. 잊혀졌다는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다.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연구자들에게도 배타적이랄까. 이런 점이 그들에 대한 조명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박경주 대표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