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열풍 속 저렴한 가격에 펑키한 스타일로 재조명

Viva.H의 페이크 퍼 코트
온 거리가 복실복실하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퍼(fur)지만 이번 겨울엔 아예 온 거리를 점령했다. 짧게 깎아 푹신하고 윤기가 흐르는 쉬어드 밍크, 길고 끝이 뾰족뾰족해 터프해 보이는 여우털,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몽골리안 램 등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길이가 허벅지까지 오고 가죽띠로 허리를 살짝 졸라매는 퍼 베스트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으로, 패션 매장과 인터넷 쇼핑몰을 휩쓸며 시즌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6년 만에 영하 16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진 어느 날, 이 퍼 베스트를 입기 위해 한 겹의 스웨터로만 감싸인 팔뚝을 하릴없이 대기 중에 노출시킨 채 떨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퍼가 더 이상 보온의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짜라서 더 좋아? 가볍고 싼 페이크 퍼

모피의 가장 큰 기능은 뭘까? 촌스럽지만 아직까지는 부의 상징일 것이다. 추위를 견딜 수 없다면 모피 대신 패딩을 사면 되니까. 그 다음이 보온성. 눈으로 보기에도 따뜻하고 몸에 걸치면 더 따뜻한 모피의 보온력은 아직까지 모직 코트가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다.

퍼가 가진 패션성, 외관의 매력은 그 다음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매력이 최근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매력을 잠식했다. 부티나서도 아니고 따뜻해서도 아니고 그저 예뻐서, 그 풍성하고 복실복실한 외관을 대체할 마땅한 것이 없기 때문에 털을 걸친다. 그러다 보니 밍크, 여우털 등 값비싼 모피 외에도 비교적 저렴한 몽골리안 램과 토끼털, 렉스(모피용 돌연변이 토끼)의 활용도가 부쩍 높아졌고 이들과 함께 페이크 퍼(fake fur), 즉 인조 모피가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스텔라 매카트니 09 F/W
페이크 퍼는 최근 몇몇 하이 패션의 런웨이에서 발견됐다. 원단 비용보다 디자인 비용이 현저하게 높은, 고부가가치의 세계에서 인조 모피를 사용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환경 보호에 관심이 많은 스텔라 매카트니는 니트 소재를 부슬부슬하게 일으켜 양털처럼 보이게 만들거나 카페트나 수건에 쓰이는 파일 조직을 이용해 퍼의 볼륨을 따라했다.

소재 가지고 장난 치기를 좋아하는 프라다는 모헤어를 풀로 붙여 만든 가짜 모피를 일찌감치 선보였고 돌체앤가바나의 부글부글한 양털 조끼도 실은 인조 모피다. 지금은 은퇴하고 없는 마틴 마르지엘라는 마지막 가는 길에 페이크 퍼를 어디까지 독창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머리색과 똑 같은 인조 털을 어깨와 몸통 전체에 늘어뜨린 그의 의상은 머리카락 같기도 하고 옷 같기도 해, 페이크 퍼이기 때문에 가능한 기괴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국내에는 아직까지 차르르 떨어지는 리얼 퍼에 대한 집착이 남아 페이크 퍼의 수요가 많지는 않지만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브랜드를 중심으로 캐주얼한 인조 모피가 나오고 있다.

여성 듀오 디자이너가 만드는 Viva.H는 이번 겨울 레오파드 무늬의 페이크 퍼 코트를 디자인했는데 퍼를 사용하고도 어떻게든 슬림하려고 애쓰는 최근의 디자인 추세를 비웃듯이 한껏 덩치를 부풀려 만들었다. 볼륨으로만 봤을 때는 유한 부인의 밍크 코트를 떠올리게 하지만 어딘지 섹시하고 펑키한 느낌이 드는 것은 호피 무늬 때문이기도 하고 페이크 퍼 특유의 질감 때문이기도 하다.

하이 패션에서 페이크 퍼를 사용하는 것은 환경 보호라는 기업 철학을 이행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리얼 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디자인 세계를 페이크 퍼로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밍크나 담비털처럼 값비싼 리얼 퍼는 그 높은 가격 때문에 가능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디자인이다. 1++급의 한우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심지어 숯불 냄새가 배일까 봐 숯불도 쓰지 않고 돌판에 조심스레 굽는 것이 정답인 것과 마찬가지다.

돌체앤가바나 08 F/W
반대로 페이크 퍼는 요리사의 기량에 몸을 맡긴 평범한 재료다. 손 대는 이에 따라 싼 맛에만 찾는 음식이 되기도 하고 독창성과 유머가 가미된 최고의 요리로 태어나기도 한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들이 푸아그라 대신 감자로 자신의 시그니처 요리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의 기량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페이크 퍼로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인의 스펙트럼은 실로 다양하다. 가공법이나 사용한 털에 따라서 그 안에서도 퀄리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품질 좋은 페이크 퍼는 전문가의 눈으로도 구분이 힘들 정도로 리얼 퍼의 우아한 외관을 재현한다. 반대로 완전히 키치하거나 펑키한 무드를 표현하고 싶을 때도 인조 모피만한 것이 없다.

힙합퍼들이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싸구려 금목걸이만 한 채 걸치는 거대한 모피는 그 불량함이 가죽 재킷 저리 가라다. 리얼 퍼로도 이런 캐주얼한 연출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합성 섬유 특유의 빤질거리는 질감은 리얼 퍼가 상징하는 부의 세계를 비웃기에 아주 적당한 도구다.

"제일 좋은 건 역시 가격 대비 만족도죠."

Viva.H 이하정 디자이너의 말처럼 페이크 퍼로 만든 옷의 가격은 리얼 퍼의 10분의 1 수준이다. (모피의 품질에 따라 그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싼 페이크 퍼는 사지 않기를 권한다) 하나 사서 대를 물려가며 입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세대에게는 저렴한 페이크 퍼 아이템을 여러 벌 사서 취향과 유행에 따라 바꿔 입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마틴 마르지엘라 09 S/S
관리만 제대로 한다면 페이크 퍼도 몇 년을 두고 입을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이 좋아진 데다가 털 빠짐이 많고 모피 특유의 냄새가 나는 리얼 퍼에 비해 다루기도 쉬운 편이다. 관리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고 그저 꼬박꼬박 드라이 클리닝을 해주고 통풍 잘 되는 곳에 걸어두기만 하면 된다. 거기다 컬러나 무늬도 다양하고, 무게도 훨씬 가볍고, 애먼 동물을 때려잡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바람직한가.

퍼와 머리카락의 경계선에 걸린 디자인도 금세 받아들일 만큼 우리나라의 패션 센스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캐주얼한 페이크 퍼가 거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일 날도 곧 다가오지 않을까? 컬렉션 사진: style.com

시크하게 페이크 퍼 입기

Viva.H 서한영ㆍ이하정이 말하는

서한영: 저는 퍼를 입을 땐 한 번도 힐을 신어본 적이 없어요. 아우터가 드레시하면 다른 건 캐주얼 해야 둘 다 살거든요. 그래서 전 꼭 스니커즈랑 매치해요.

이하정: 만약 꼭 높은 구두를 신고 싶다면 더 간단한 방법으로 안에 티셔츠를 입는 것도 괜찮아요. 집에서 막 입는 것 같은 그런 캐주얼한 티셔츠 있잖아요.

서한영: 퍼 코트에 스커트에 하이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드레시하게 입는다면 말 그대로 드레시한 무드를 표현하는 데는 성공이에요. 하지만 각각의 아이템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부피가 큰 퍼를 입을 땐 머리도 풀어 헤치는 것보다 밴드를 이용해서 하나로 딱 묶는 게 예뻐요.

이하정: 아니면 아예 '투 머치(too much)'로 가는 것도 재미있어요. 호피 무늬 퍼에 호피 무늬 레깅스를 신어 버리는 건 어때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