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용지>전9명의 그래픽 디자이너 규격화, 대량생산 현상에 문제 제기

만만한 게 A4 종이다. 흔하고 익숙하다. 오죽하면 드라마 <꽃보다 남자> 귀공자 4인방의 개그 프로그램 버전이 'A4'였을까.

그러나 흔하고 익숙하다는 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A4의 크기와 가로세로 비율은 '표준'이다. 그게 눈에 붙어서 다른 크기와 비율의 사각형은 불편할 때가 있고, 대부분의 공문서 작성 기준은 A4에 맞춰져 있다. 알고 보면 세상은 A4의 미학에 길들여졌지만, 누구도 A4가 왜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고 그럴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이는 상식의 권력이다. 상식은 편리하지만 호기심과 상상력, 반성을 무디게 한다. 상식 이외의 가능성을 막는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도 A4용지는 딜레마였을 것이다. 기술로서의 디자인을 구현하고 소통시키는 데에는 더없이 편리한 '매체'지만 끊임없이 기존 형식을 변형하고 넘어서는 데서 발생하는 디자인의 예술성을 가두는. 상식의 효용을 인정하되 가끔 한계를 느낀 디자이너들은 A4용지에 투항하거나, 그것을 찢어버리지 않는 제3의 길을 모색했다. A4용지를 모티프로 삼은 디자인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인 전이 지난 23일부터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2007년 열린 를 이은 두 번째 전시로, 'A4용지'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중요했던 첫 전시에 비해 한층 메시지가 뚜렷해진 인상이다. 총 9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A4용지에서 환기되는 규격화,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생산 현상에 대해 발언했다.

서동주 디자이너는 "의미 없이 사용되고 의미 없이 버려지는" 세상의 모든 A4용지 속에서 가치 판단의 문제를 제기한다. 가치와 무가치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몇 장 차이"다. 사무실 복사기에 넣은 한 묶음의 A4용지 중 어떤 것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중요한' 사람들에게 읽히는 데 비해, 어떤 것은 단지 인쇄가 잘못 되거나 뭐가 묻었단 이유로 가차 없이 버려진다. 소비되기 위해 태어난 생이란, 허망하기도 하다.(<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A4>)

김의래 디자이너는 그 와중에 가장 출세한 A4용지들을 찾아냈다. 법정의 판결문, 정치 연설문 등 권력의 핵심에 가까이 간 이들이다. 그 지위에 걸맞게 다양한 양식으로 꾸며 전시한다. 그리고 묻는다. 이것이 권력의 실체일까. "법의 실체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적어도 그 실체의 일부는 판결문에 있다. 판결문은 법의 해석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며, 선례로서 중요한 힘과 권위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권력의 얼굴, "대중에게 밝은 꿈을 제시하는" 이 텍스트들에는 정작 "모든 정권에는 목적이 있고 어떤 정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 때로는 폭력 행사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원리가 빠져 있다.(<국가권력과 A4>)

강구룡 디자이너와 정소미 디자이너는 각각 대량생산과 규격화라는 시대사회적 흐름 속에서 어떻게 개인들이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지향할 수 있을지를 디자인으로 탐색했다. 강구룡은 '식자공'이 되고자 했던 꿈을 실현한다. A4용지로 글꼴을 디자인한 것. A4 고유의 비율, 접고 찢고 색칠할 수 있는 종이의 성질을 반영한 글꼴은 독창적이면서도 "대량생산되는 A4용지처럼 하나의 제품으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

정소미 디자이너는 우리 모두가 사무실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예술행위를 제안한다. 그는 "A4 규격의 98페이지로 된 문서를 98번 복사기로 복사하여 각 페이지를 150장씩 뽑은 후 14700장의 종이에 스프링바인딩 펀치로 구멍을 각 30개씩 내어 그러니까 총 441000개의 구멍을 내었고 그 종이들을 스프링바인딩 기계에 넣어 150개의 스프링으로 150번 찍어내어 150부의 또다른 하지만 같은 A4 규격, 98페이지 문서로 만들었다." 결과는 예상처럼 '기계적'이거나 '규칙적'이지 않으며 디자이너의 행위는 발생할 수 있는 차이들에 대한 실험이 된다.()

이쯤 되면 "규격은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적 합의 가운데 (가장 구속력 없는 약속 중) 하나"(최혜미 & 석재원, <일반적인 사회화>)라는 명제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발목 붙잡는 것은 무엇인가. 최혜미와 석재원 디자이너의 작업이 힌트다.

그들은 'A4용지의 규격이 사회적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100명의 사람들에게 답을 구한다. 1세부터 100세까지 각 연령별로 1명씩에게, 가는 선으로 A4 규격이 표시된 종이를 주고 그림 그리도록 했다. 사회화될수록 그 사각형의 경계를 의식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과연 그 예상은 적중할 것인가, 그리고 한국사회의 상식에는 얼마만큼의 예외와 다양성, 상상력이 포함되어 있을까. 전시는 31일까지 열린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