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명문가 2세 위한 첫 번째 무대 한국무용사 과거와 현대의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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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의 2세'는 평생을 주위의 기대와 편견과 싸워야 하는 존재다. 어릴 때부터 이들은 이름이 없다. '누구의 아들'이자 '누구의 딸'로 살아온 이들은, 어쩌다 부모와 같은 길을 걷게 되어도 '부모의 명성에 흠이 되지 않게', 때로는 '부모보다 더 나은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자타의 압박에 시달린다. 더욱이 그렇게 이룬 성과엔 또 다시 '부모의 후광 덕'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이 쏠리기도 한다.

예술가 명인의 2세들은 그런 압박이 한층 심하다. 노력 이상의 재능과 운 또는 계기가 필요한 예술가의 인생. 이들은 명인의 피를 이어받아 그 재능과 계기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기성 예술가가 된 후에도 그들은 자신의 예술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누구의 자식'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명인 부모는 고마운 스승이자, 언젠가는 극복해내야 할 시련이기도 하다.

28일 열리는 한 공연은 이 2세 예술가들이 이런 복잡한 굴레를 자신들의 예술적 끼와 재능으로 풀어내는 단초가 될 전망이다. 멍석을 깔아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춤의 대표적인 명인 벽사 정재만 선생(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이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사단법인 벽사춤아카데미를 운영해온 그는 이번에 벽사댄스컴퍼니로 이름을 바꾸면서 '벽사무용주간' 공연의 일환으로 <명문가 명무전>을 마련했다.

'명문가'라는 이름답게 참가자들과 그 '가문'은 그대로 한국무용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한국 신무용사의 산 역사인 김백봉 가문의 안병헌과 안귀호, 교방의 혼을 지켜온 이매방 가문의 이현주, 전통연희의 대표주자 김학석 가문의 김혜영, 영남춤의 거목 김온경 가문의 윤여숙, 승전무의 지킴이 한정자 가문의 김정련, 경남춤의 대를 잇는 엄옥자 가문의 변지연, 대중에게 사랑받는 명가 임이조 가문의 임현지, 그리고 벽사 한영숙의 대를 잇는 정재만 가문의 정용진과 정형진이 출연해 명인의 진한 피를 증명하게 된다. 벽사무용주간의 핵심이 되는 이번 공연은 말 그대로 '춤 명문가' 2세들을 위해 마련된 첫 번째 무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두 종목(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의 인간문화재인 우봉 이매방의 가문에서는 딸 이현주가 무대에 올라 장검무를 선보인다. 이현주는 "워낙 유명인의 자제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했고, 무대에 섰을 때도 부담이 많이 됐다"며 명인의 딸로 살아온 삶의 고충을 토로한다.

안병헌 '청명심수'
부모는 딸이 예술가의 길 대신 인문계 학교를 나와 평범한 인생을 살기를 바랐지만 명인의 피는 운명처럼 딸을 춤으로 이끌었고, 이현주는 현재 아버지가 보유한 승무와 살풀이의 이수자가 됐다. 그는 "지금은 내가 '이매방의 딸'로 불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버지가 '이현주의 아버지'로 불리게끔 앞으로 더 열심히 정진할 것"이라고 포부를 내비친다.

비록 2세 예술가들의 진면목을 재발견한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기는 해도, <명문가 명무전>에는 어쩔 수 없이 명인의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특히 명인들의 영향력이 큰 한국춤 분야에서 아직 젊은 2세~3세의 이름은 부모의 명성과 함께함으로써 정체성을 가진다. 그래서 이번 무대는 오히려 명인들의 진한 예술혼을 계승하는 작업의 현재를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2대와 3대가 동시에 나서는 김백봉 가문의 무대는 특히 그런 계승의 의미가 두드러진다. 김백봉 선생의 둘째 딸 안병헌(한북대학교 교수)에 이어 부채춤으로 무대에 서게 된 손녀 안귀호(서울종합예술학교 무용예술학부 교수) 역시 거목의 무게 때문에 힘든 성장기를 거쳤다. 콩쿠르도 일부러 안 나갈 정도였다. 상을 타도, 못 타도, 구설수에 오를 것은 뻔했기 때문.

대학 시절도 온갖 소문들 속에서 마음을 추스리며 보내야 했다. 하지만 공부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 이름보다는 '김백봉의 손녀'라는 위치에서 김백봉무용단을 이끌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

주변의 시샘도 이제는 더 나은 무용가가 되라는 채찍으로써 즐기게 됐다는 그는 조모의 명무를 계승한다는 과업을 자신의 우선적인 숙제라고 말한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그동안 창작 작품 중 명무가 된 작품이 얼마나 있을까. 명무의 계승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것은 그 다음이 아닐까."

임현지 '살풀이'
한편 이번 공연에서 태평무를 선보이는 김혜영(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경우는 명인 아버지라는 배경을 철저히 숨기며 춤을 춰온 경우다. 이번 공연에 참가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누구 딸로 가는 거냐"고 물었을 정도. 실제로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인 아버지 김학석 선생의 탈춤이 아니라 정재만 선생의 태평무로 무대에 오른다.

김혜영은 무용가로서는 늦은, 고등학생 때 춤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피는 속일 수 없었다. 예고를 거쳐 대학에서 전통춤을 전공한 그는 이후 국악원에서 춤을 업으로 삼으며 기어이 무용가의 길을 걷고 있다. 아버지의 탈춤을 전수받을 생각도 잠깐 했지만 "매주 나올 게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이수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최근 처용무를 이수하게 된 김혜영은 처용탈을 쓰고 춤을 추다 불현듯 아버지의 탈춤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명인 아버지의 존재가 어릴 때는 독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나니 무용가로서 정진하게 하는 약이 되는 것 같다"고 회고한다.

이 공연을 연출한 정재만 숙명여대 교수는 "그동안 후대들은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을 인정받기보다는 '누구누구의 자식이니까 그렇지' 라는 선입견으로 선대와의 비교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타고난 재능으로 대를 잇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숙명처럼 살고 있다. 전통문화와 춤의 지킴이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서 이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 달라"고 당부했다.

가문을 대표해 치러지는 2세들의 <명문가 명무전>은 이미 명인의 피에 대한 고민이 어느 정도 끝난 '예비 명인'들의 오늘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선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안에 자기만의 예술을 녹여내고 있는 그들의 춤은 명인들의 춤과 어떻게 닮았고 다를까. 그들의 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안귀호 '부채춤'

정형진 '태평무'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