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더글라스 고든의 비디오 아트서사의 파괴, 이미지 반복 등 통해 도플갱어 영화 자체를 대상화

더글라스 고든, self portrait-kissing with Scopolamine
영화가 발명된 초창기에 영화는 말 그대로 음성이 없는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영상물이었다. 음성 없는 이미지는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요소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무성영화는 언어의 예술이 아닌 이미지의 예술이 될 수 있었다.

이미지라는 것이 언어와 달리 원래부터 그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언어가 침투하게 될 때 오히려 이미지가 지닌 본래의 의미는 단순화되거나 심지어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로드코(Mark Rothko)의 그림 <지하철 입구>(Entrance to Subway, 1938) 를 보자.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그림은 분명 지하철의 계단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거주하던 뉴욕의 지하철역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그림의 이미지에 합당한 제목을 보고 의심 없이 이 그림의 의미는 지하철의 풍경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하지만 로드코의 관심은 결코 지하철 풍경이 아니며, 이 그림의 중요한 의미 또한 지하철의 풍경이 아니다. 어쩌면 이 그림은 지하철 내부라는 특정한 장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후 추상화가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로드코의 그림을 보면 이 작품에서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결코 지하철의 풍경이 아닌 단순한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최소화된 색상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지를 언어로 이해하고자 할 때 생긴 착각이다.

또 하나의 예로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Broadway Boogie-Woogie, 1942-3) 를 들 수 있다. 작품의 제목 탓에 일반 관객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평론가들 역시 몬드리안이 이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현란한 뉴욕의 브로드웨이 밤거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글라스 고든, Monster
심지어 구체적인 장소를 제목으로 붙인 이 시기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경향은 과거에 완전한 조형적 추상으로부터 특정한 도시를 대상화하는 재현 회화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가 붙인 뉴욕, 브로드웨이, 트라팔가 광장 등의 제목은 단지 그가 해당 작품을 작업하고 있던 장소의 이름에 불과하였을 뿐 결코 이미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무성영화가 유성영화에 비해서 언어에 덜 구속받는다는 측면은 영화가 본래부터 문학 텍스트와는 상관없이 사진이라는 매체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지금과 같이 화면 자체에 자막을 삽입할 수 없었던 초기 무성영화 시절에는 영화가 언어가 아닌 이미지의 연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에 의한 연결과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연결은 어떤 점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활동에 상응한다.

평상시 우리의 의식은 명증한 언어의 논리에 지배를 받는다. 평상시 말할 때마다 우리의 의식은 전후의 맥락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을 미리 짐작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욕구를 억제한다. 이에 반해서 꿈과 같이 무의식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언어적인 논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전개된다. 언어가 배제된 이미지들의 연결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는 무의식이나 꿈의 세계와 가깝다. 영화가 꿈의 공장이라면 영화가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의식의 검열을 받지 않은 무의식이나 꿈속에서의 내가 단순히 허구적인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술이 취해서 갑작스럽게 돌변하거나 꿈속에서 온갖 추한 짓을 하는 끔찍한 나의 모습은 허구가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 아니 오히려 현실세계에서의 위선이 제거된 실재 나의 모습이다.

의식세계에서의 나와 무의식세계에서의 완전히 다른 이중인격인 듯 보이지만 그 이중적인 모습 모두가 바로 나의 모습인 셈이다. 어쩌면 무의식의 세계가 더 실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언어라는 의식의 기제에 지배당하지 않는 이미지로서의 영화는 마치 꿈의 세계와도 같은 실재(?)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로드코, Entrance to Subway
독일의 매체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초기의 무성영화 시절에 도플갱어(Doppelgänger, double)를 소재로 한 영화가 붐을 이루었던 특이한 사실에 주목한다. <프라하의 학생>, <골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프라하의 학생>, <타인> 등 1910년대 말과 20년대 초에 도플갱어 영화가 마치 유행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키틀러에 따르면 이러한 도플갱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다. 도플갱어 영화의 공통적인 특성은 평상시 멀쩡한 주인공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을 만나게 되는데 그 분신은 항상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라하의 학생>이나 <타인>의 경우처럼 그 악마 같은 분신을 제거할 경우 결국 자신도 죽고 만다. 이는 곧 그 악마가 바로 자신임을 의미한다. 악마란 의식의 세계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자신의 깊숙한 곳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인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 악마는 술에 취해 의식의 통제에서 풀려나거나 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평소에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실재인 것이다.

도플갱어 영화들은 꿈이나 무의식에 감춰진 분신을 실재의 모습으로 현실화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 영화가 꿈의 공장이라면 아름다운 판타지의 구현이 아닌 무의식의 실상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구현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후 유성영화와 더불어 이미지는 언어에 종속된다. 영화와 경계를 구별 짓기가 매우 모호한 비디오 아트가 영화와 차별성을 갖는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을 바로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비디오 아트는 분명한 서사를 의식적으로 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디오 아트가 단지 영화와 다른 영상예술만은 아니다. 오히려 비디오 아트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화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영화 자체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비디오 아트의 초기 관행 중 하나가 어떤 동작이나 장면을 느린 화면이나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반복하는 것이었는데 물론 이는 통상적인 영화에서 만들어진 기법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클로즈업이나 느린 화면의 반복은 스토리의 전개를 완전히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될 뿐이다. 반면 비디오 아트는 의식적으로 그러한 범위를 파괴한다. 오히려 서사나 스토리는 부재하면 무의미한 것처럼 여겨지는 짧은 동작을 마치 정신병자의 반복적 행위처럼 반복적으로 재생한다.

이러한 비디오 아트의 관행은 비디오 아트가 영화와 차별성을 지니려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 자체를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비디오 아트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정된 서사의 파괴와 이미지의 반복, 시간적인 왜곡, 거울이미지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무성영화 시대의 도플갱어 영화가 영화에 관한 영화였다면 비디오 아트는 이러한 도플갱어 영화의 이중성 자체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더글러스 고든(Douglas Gordon)의 비디오 아트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가 영화와 구분되는 비디오 아트 자체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영화적 서사구조로부터의 이탈과 시간적 왜곡, 그리고 이미지의 반복이라는 비디오 아트의 일반적 관행을 따르고 있다.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샤워 도중의 살해 장면을 느린 속도로 무한히 반복하는 <24시간 사이코>는 비디오 아트의 일반적인 관행에 충실한 작품이다.

하지만 고든의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거울이미지 혹은 같은 장면을 두 개의 스크린에 투사하는 것이다. 가령 <면죄 받은 죄수의 고백>(Confessions of a Justified Sinner, 1996)는 두 개의 스크린을 활용한 멀티채널 작품인데, 이 작품의 일부는 두 개의 스크린에서 동일한 인물의 장면이 한 쪽 스크린에는 포지티브 필름으로 다른 쪽 스크린에서는 네거티브 필름으로 인화되어 영상이 전개된다.

<괴물>(Monster, 1997)이라는 작품 또한 두 개의 스크린이 설치된 멀티채널 작품인데, 여기서는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담은 스크린과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얼굴에 테이프를 붙인 기괴한 자신의 얼굴을 담은 스크린이 동시에 상영된다.

<스코폴라민을 섭취한 상태에서 키스하는 자화상>(self portrait-kissing with Scopolamine, 1994)에서는 스코폴라민이라는 약을 섭취하여 거의 환각의 상태에서 스스로 키스하는 네거티브 필름으로 인화된 자화상의 이미지가 투사된다. 주지하다시피 스코폴라민은 부교감신경을 억제하는 약물이다. 이 약물을 섭취하면 혈압이 상승하고 심장박동이 거칠어지거나 지나치게 약해지기도 한다.

얼핏 보면 고든이 발표한 일련의 거울이미지 작품들은 현대인의 자아분열이라는 통속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매우 피상적인 독해에 불과하다. 그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간에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아니 영화라는 매체를 영화와는 매우 이질적으로 사용하는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커다란 스크린과 깜깜한 조명이라는 영화관의 환영장치(곧 스코폴라민)를 통해서 스크린의 주인공과 관객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 속에 몰입되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 그러한 동일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환각상태에 빠져서 자신에게 키스를 하고 있는 광경과도 같다. 무성영화가 도플갱어를 통해서 영화에 관해서 말했다면, 고든의 작품은 그러한 도플갱어 영화를 대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