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제건축영화제 등 사회와의 소통 노력 활발

지난 1월 27일에 열린 '메가시티 네트워크' 전 건축가와의 대화
"정체성이란 무엇입니까?"

대학교 철학과 수업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다. 지난 1월27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건축가와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던진 질문이다. 엉뚱해 보이지만 이 질문이야말로 어쩌면 지금 한국사회가 건축가들에게 가장 궁금하고 기대하는 바를 함축한 것인지 모른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형성되어 온 우아한 전문직의 이미지를 깨뜨리며 성큼 대중에게 다가선 건축가들에게 말이다. 건축 전시와 영화제를 통해, 다양한 일반인 참여 프로그램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그들이 추구하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건축가, 삶의 문제에 답하다

건축가들의 '바깥나들이'가 부쩍 눈에 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지난 1월20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건축가와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현대건축을 테마로 한 <메가시티 네트워크> 전의 부대행사다. 전시에 소개된 건축가들이 출연해 강연하고 관객과 함께 토론하는 자리다.

지난 1월27일에는 서울 강남대로의 벌집 모양 건물 '어반 하이브urban hive'로 유명한 김인철 건축가, 서울시 신청사를 설계한 유걸 건축가, 인사동 '쌈지길'의 최문규 건축가, 국내 대표적 건축사사무소인 정림건축의 이필훈 대표이사, 공간그룹 이사인 이주연 건축평론가가 참여했다.

'메가시티 네트워크'전에 전시된 최문규 건축가의 쌈지길
이들의 강연 내용은 건축가가 대중 앞에 나선 이유와 그 의의를 짐작하게 한다. 김인철 건축가는 건축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은 그리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고, 그릇은 만드는 게 아니라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축은 짓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죠."

유걸 건축가는 건축가와 일반인이 동등하게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건축 이야기를 일부러 뺐다." 대신 건축이 놓인 도시 환경과 그 사회문화적 맥락을 강조하며, 사회가 건축을 통해 공동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서울의 건물들은 자꾸 높아지는데, 왜 높아져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가치 판단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건축가들의 말 속에서 건축과 삶, 건축과 사회는 임의로이 섞이고 서로 녹아들었다. 이는 결국 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최문규 건축가는 쌈지길을 예로 들었다. "쌈지길의 입장료를 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길인데 통행료를 받는 경우가 어디 있냐'는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대표가 반성문을 썼죠. 사실 쌈지길은 개인이 소유한 상업 시설입니다. 입장료를 받더라도 항의할 근거는 없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 건물이 우리의 것이라고 헛갈린 겁니다. 이 사건을 보며 건축가가 고려해야 하는 게 정말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건물이나 건설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나 문화로 이해할 때 건축은 "세계에서의 삶에 대한 총체적 문제"(유걸 건축가)가 된다. 이날 관객들의 질문이 '세종시 문제'부터 정체성에 대한 것까지 다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메가시티 네트워크> 전을 총괄기획한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건축가가 대중과 호흡할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개별 건축가와 건축물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공공 서비스public service로서의 건축을 조명하는 것이 전시의 취지였기 때문이다.

작년 6월 건축문화학교에서 진행한 나무정자 만들기 프로그램
건축의 사회적 정체성 찾기

왜 지금 건축과 사회의 소통이 필요할까. 작년 11월 처음으로 열린 서울국제건축영화제의 한선희 프로그래머는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보편화된 건설 문화로부터 건축이 독립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파괴와 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건설 문화가 건축의 다양한 가치와 사회적 역할을 왜곡한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 왜곡에는 건축가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로 각인시킨 미디어도 한몫했다. 김성홍 교수는 "건축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TV 속 고상한 예술가 혹은 건설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건축가의 현실이 그 중간에 있다는 것을 이해 받지 않고는 '건축문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강병국 건축가의 말대로 "건축문화는 건축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이 미술, 음악, 영화 같은 예술문화 장르의 하나이자 차세대 '창조 산업'으로 부각된 사회적 분위기는 소통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서울 광화문 미로스페이스 한 관에서 4일간 열린 서울국제건축영화제는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총 객석점유율이 70%에 달했고 주말에는 모든 상영작이 매진될 만큼 성황이었다. 상영작 중 두 편은 영화제가 끝난 후 연장상영되었다. 이 영화제를 기획했고, 부대행사인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강병국 건축가는 "관객의 질문이 대단히 많아 건축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김인철 건축가의 어반 하이브가 '뜬' 과정도 이를 증명한다. 완공도 되지 않은 어반 하이브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바로 네티즌이었다. 인터넷에서 그 독특한 생김과 구조가 화제가 된 후 일간지 등 언론이 주목했다. 그것은 "건축물이 완공된 후 건축 전문지를 통해 소개되는 이전의 제한적인 방식과 매우 달랐다." 김인철 건축가는 이 사례를 통해 "건축가의 진정성이 담긴 건축이라면 충분히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작년 11월에 열린 제1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이런 분위기가 한국 사회의 산업 구도를 바꿀 패러다임 형성으로까지 이어지길 기대하는 시선도 있다. 한국의 GDP 대비 건설투자 비중은 약 18% 정도로 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경제 경제가 고도화될수록 건설투자 비중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작년 10월 한국건설산업연구원도 "2020년에는 GDP 대비 건설투자 비중이 11% 정도로 낮아진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는 건설업의 무게를 분산시킬 대책을 세우고 지식서비스업 중심의 산업 지형을 논의해야할 시점이라는 뜻이다. 김성홍 교수는 "건축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건설 지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건축을 새로운 산업으로 육성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상 속에 자라나는 건축문화

변화는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건축을 통해 삶과 사회를 성찰하고,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이상적 미래를 구상하자는 건축가들의 제안이 구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일반인 스스로 건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한국건축가협회가 작년에 문을 연 건축문화학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시민사회에 건축문화의 씨를 뿌리고 있다. 매달 건축 관련 교양 강좌를 마련했고 나무정자 만들기, 어린이 건축교육, 전시회 공간 만들기 등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건축문화학교의 곽재환 교장(우)과 홍선희 총괄본부장(좌)
이곳 프로그램의 특징은 일부 전문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건축'의 통념을 깨뜨림으로써 건축에 대한 인식을 새롭고도 친밀하게 재구성하도록 돕는다는 것. 이는 '건축은 예술인가?', '건축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 '자연으로서의 도시-문화로서의 공원', '무장애 사회', '종교 건축과 영성' 등 강좌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건축문화학교의 웹사이트(www.archiaa.org)에는 "시민과 건축인들이 만나 건축 문화를 향유하는 시간을 갖고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감대를 마련하는 장"이라는 설립 취지가 적혀 있다.

꾸려가는 이들부터 건축가 반, 비건축가 반이다. 언론인과 예술가, 인문사회학자들이 고루 포진해 있다. 내부에서부터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다. 여기에 소통의 접점을 더해줄 수 있는 열정과 기획을 가진 이라면 분야에 상관없이, 언제나 동행으로서 환영이다.

드나드는 이들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지난 1월28일 김성홍 교수의 특별 강연이 열린 서울 대학로 서울문화재단 연습실에는 강연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당황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청중이 모였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교 건축동아리 학생들, 대학생과 주부가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건축문화학교의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해온 사람들이다. 그만큼 건축문화학교가 활짝 열린 채 시민사회의 일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교장인 곽재환 건축가는 "지난 1년간의 운영 의의는 건축과 사회 간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선희 총괄본부장은 "온라인 상 카페(cafe.naver.com/archiaa) 회원 수만도 약 1000명이 되었고, 정기 강좌마다 고정적으로 참가하는 사람이 30명 정도다. 건축문화학교를 좋아하고 신뢰하는 층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체험 프로그램을 통한 건축 경험은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곽재환 건축가는 "집짓기 프로그램은 시민들이 삶의 터전을 손수 만들고 가꿀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길러준다"고 말했다. 건축문화학교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주부 조기련 씨는 "이 체험이 내 집이 되고, 동네가 되고, 도시를 이루며 나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런 개개인의 자각이 공공 담론으로 확장되는 상황이야말로 지금 건축가들이 소통으로 설계하려는 이상향이 아닐까.

건축문화학교 곽재환 교장 & 홍선희 총괄본부장 인터뷰

올해 건축문화학교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작년보다 심도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시에 더 다양한 문화 장르, 더 다양한 현장과 단체와 건축문화를 매개할 계획이다. 지난 1월28일 곽재환 교장과 홍선희 총괄본부장을 만나 작년의 운영 결과에 대한 자체적인 평가와 올해의 구상을 들었다.

- 올해 운영 계획은 세웠나.

곽재환 교장(이하 '곽'): 작년에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올해는 선택과 집중을 하려고 한다. 4개 정도의 큰 테마(예를 들면 일터, 놀이터, 배움터, 치유터 등)를 정해 각각에 대해 건축은 물론 여러 사회적 관점을 논의할 수있는 커리큘럼을 생각하고 있다. 다른 문화 장르와의 경계 허물기는 계속할 것이다.

홍선희 총괄본부장(이하 '홍') :외부와 연계해 건축문화를 확장하는 시도를 할 것이다.작년에도 몇 차례 매개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서울 마포구에서 '나무정자 만들기'를 한 후, 이를 통해 관계를 맺은 구청의 요청으로 '우리 동네 우리 건축 둘러보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건축문화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고등학생이 자신의 학교에 건축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우리 쪽 강연자를 파견할 수도, 시민사회단체나 동주민센터에 건축 강좌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작년 한해 운영한 결과 중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곽: 공간 나눔 오픈하우스를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폐쇄되고 통제된 공간을 특정 기간 동안 모두에게 무료로 공개해 땅의 공공적 성격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호응이 필요하다.

홍: 온라인 카페가 좀더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회원들이 우리가 마련한 강좌만 듣지 말고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문화를 형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예산 조달은 어렵지 않나.

곽: 이영희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회장이 제공한 기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올해에는 공공기금 지원을 신청한 ㅅ아태다.

홍: 기업들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메세나 활동을 많이 하는데 공연이나 미술만 대상으로 삼지 말고, 이런 곳에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최근 건축가들이 사회와 소통하려는 시도를 많이 한다. 건축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곽: 건축은 생활 양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물질적인 가치만 강조했던 사회에 문화적 시각에서의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건축가들도 문화를 이끌어가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홍: 오늘날 건축은 국가의 문화적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곽: 그런 만큼 많은 사회 문제가 건축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시민들이 건축문화를 공유해야 건축에 대한 공공적 권익을 논의하는 담론이 형성될 수 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