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네이티리'멘토'로서의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낭만적 환상을 창조

영화 <아바타>의 매혹적인 캐릭터 네이티리를 바라보면서 '원주민 여성'을 바라보는 이방인 남성의 시각이 엄청난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네이티리를 얻기까지 <늑대와 춤을>과 <>를, <>과 <>를 거쳐왔다. 이 영화들 속의 원주민 여성은 어딘가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존재, 그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더욱 매력적인 존재, 그러나 '이방인 남성'이 속한 문명사회보다 분명히 열등한 존재로 그려졌다.

오리엔탈리즘의 미의식은 동양인들에게도 이미 깊숙이 각인된 지 오래다.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백인 여성'의 미모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과 가 그녀들보다 훨씬 '못생겼다'고 느꼈고 그녀들은 결코 동양의 인어공주나 백설공주만큼 강력한 문화적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나마 과 는 여성 영웅담의 주인공으로서 추앙되는 유명 인사이지만, 그 이전의 수많은 서부 영화나 헐리웃 액션물에서 동양인과 인디언으로 대표되는 '원주민 여성'들은 '이방인 남성'의 하룻밤 구애의 대상이거나 일시적인 '현지처'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발적인 욕망을 지닌 주체가 아니라 가구나 가축처럼 주인남성에게 길들여지는 존재였다. 시골로 농활 온 남자 대학생이 순진한 동네 처녀를 임신시키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스토리,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 군인이 자신의 혈육인 '라이따이한'을 남겨둔 채 베트남 여성을 버리고 오는 스토리……. 이 모두가 이방인 남성의 원주민 여성을 향한 판타지와 폭력을 형상화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은 혁명적인 영화였다. 아름다운 주제가로도 잘 알려진 <>의 스토리는 '이방인 남성'의 눈에 비친 '원주민 여성'의 갈등 구조를 넘어 원주민 여성 스스로의 고뇌와 성장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김연아 선수의 갈라쇼 배경 음악으로도 쓰였던 <> 주제가의 가사와 영화 속 의 독백은 마치 현대 여성의 고민을 그대로 여과 없이 묘사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바타의 네이티리
"제 모습을 보아요. 전 현모양처감이 아니에요. 좋은 딸도 될 수 없고요.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걸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가문에 먹칠을 해야 해요. 물에 비치는 저 아가씨는 누구인가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저 아가씨. 나도 내 자신을 알 수가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내 자신을 끝까지 속일 순 없어. 난 언제 내 본심대로 살 수 있을까."

<>의 모델은 6세기 경의 중국 서사시 '목란시'에 전해지는 '화목란'이라는 여성이었다.

"징기스칸이 군사를 모집시킨답니다. 그 많은 군첩 중에 아버지도 끼어 있어요. 우리 집엔 장성한 아들도 없고, 목란은 오라비 없으니. 내가 안장과 말을 사서, 아버지 대신 군대를 따르겠어요.(중략) 징기스칸이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 목란은 상서랑 벼슬도 싫고, 원컨대 훌륭한 천리마를 빌려주어, 나를 고향으로 보내주세요.(중략) 전투복 벗어 놓고, 예전 옷 다시 입어, 창 앞에서 머리 빗고, 거울 보고 화장하네. 다시 나가 전우를 보니, 전우들 놀라며 말하네. 12년을 같이 다녔건만, 목란이 여자인 줄은 몰랐구나."

남장을 한 소녀전사 은 아버지뿐 아니라 그 커다란 나라를 구하고도 고작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여성'이 되는 것을 꿈꾸었던 것일까.

다시 부모님의 딸로 사랑받기 위해, 양갓집 규수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마을 공동체의 품 안으로 돌아오기 위해, 은 12년 동안 남장을 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전장에서 고통받았다. 그녀는 여성의 정체성까지 위장해 가며 새로운 삶을 살았지만, 다시 돌아온 이 '자랑스런 아버지의 딸'로 남는 한 새로운 주체는 탄생하지 않는다. 도리어 남장까지 한 그녀의 선택은 가족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개인이라는 견고한 집단주의에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포카혼타스
역사 속에서 여성의 남장은 우리가 <바람의 화원>이나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본 것처럼 '여성의 자아 정체성'을 찾는 역동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겁탈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위기에 처한 부모나 남편 대신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기 위해, 정말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해야 했다.

'이방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공정 거래의 혐의가 짙다. 이방인 남성들은 원주민 여성에게서 그들이 처한 현재의 사회가 아닌 그들의 '잃어버린 과거'를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남성들의 세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여성은 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려야 하고, 처럼 남장을 하여 전쟁터에서 승리의 화신이 되어야 했다.

여성은 남성을 뛰어넘는 영웅이라도 되어야만 간신히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어 영영 문명의 경계 바깥으로 사라져버려야 하는가. 혹은 신데렐라의 언니들처럼 '나보다 예쁜 여자'를 평생 질투하고 저주하다가 외롭게 늙어가야 하는가. 그런 면에서 영화 <아바타>의 네이티리는 서양 근대 사회에서 태어나지 않은, '서구문명 바깥'의 여성을 그린 영화 중 가장 진보적인 여성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이티리는 그녀와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임을, 그녀다움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기 때문이다.

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전사가 되었고, 아버지가 인정하는 가장 남성적인 세계(전쟁)에서 성공함으로써 아버지의 세계로 편입하는 통과의례의 여정을 끝냈다. 그녀의 고민은 철저히 여성의 자리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녀가 택한 방식은 철저히 남성적이었던 것이다. <아바타>의 네이티리는 '풍경'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혹은 남성을 물리치고 홀로 서는 극단적인 대립의 여성상이 아니라, 남성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매만져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는 '멘토'로서의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낭만적인 환상을 창조했다.

가장 아름다운 외계인의 이미지(가장 낯선 것)와 가장 아름다운 원주민(가장 낯익은 것)의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합성해 놓은 것 같은 네이티리는, 그러나 여전히 숨 막히게 아름답다. 이것이 가장 보수적인 헐리웃이 지금까지 이루어낸 문화적 진보의 정점이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언제쯤 우리는 내가 가장 원하는 삶을 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여성, 굳이 금기를 깨거나 남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도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여성상을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뮬란

아나스타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