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뉴미디어 활용 시간을 해체하고 전혀 이질적 흐름 만들어내

카라바지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8
오늘날 전자음악의 고전이 된 <소년의 노래>를 작곡하면서 슈톡하우젠(Karl Heinz Stockhausen)은 소리를 5개의 테이프에 나누어 녹음하여 5개의 스피커에서 따로 재생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5개의 스피커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음들은 미묘한 공간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라는 일반적인 관행을 뒤집는 시도였다.

물론 디지털 음향기기의 발전 이후 5.1채널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음의 공간적 배치라는 것이 그다지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슈톡하우젠의 시도는 음악이 공간과는 상관없는 시간예술이라는 도식을 넘어선 새로운 음악적 시도였던 것이다.

거꾸로 회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회화는 공간적인 예술일 뿐 시간의 궤적을 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회화가 아예 시간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부터 회화는 시간의 흐름을 담는데 매우 관심이 많았다.

고대 중국의 황실회화만 하더라도 일련의 사건들을 시간적 경과에 따라서 몇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연속적으로 그렸다. 이른바 서사화로 알려진 이 그림은 마치 역사책처럼 시간적으로 경과되는 사건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화면자체에 시간을 담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그림들 각각을 시간적으로 연결해서 볼 때 시간적 경과가 이해될 뿐이다.

Dan Graham, 'Time Delay Room', 1974
정지된 화면 속에 시간적인 궤적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회화는 일상적인 시간과는 다른 시간적 차원을 담을 수밖에 없다. 바로크 회화의 거장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1598년)를 보자. 이 그림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아시리아 제국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유대 도시 베툴리아를 침공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베툴리아의 과부인 유디트는 수려한 미모를 이용하여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침실에 침투한다. 적군과의 동침 후 홀로페르네스가 잠든 사이 유디트는 칼로 그의 목을 베어 자른다. 카라바지오는 우리나라의 논개와 비슷한 이 일화에서 가장 극적인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만약 이 그림이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면, 순서는 유디트가 칼을 들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의 시간적 순서일 뿐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 표현된 시간의 차원은 사건의 인과적 순서와는 달리 진행되는 시간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베어진 목에서 유디트가 들고 있는 칼날의 방향으로 붉은 피가 직선으로 분출되고 있다. 그림을 보는 관객의 시선은 직선으로 분출된 피를 따라 홀로페르네스의 목과 얼굴로 향하며, 다시 계속하여 유디트의 창백하고도 겁에 질린 하얀 얼굴로 향한다. 이제 시선은 다시 유디트의 창백한 얼굴과 대조적인 어둡고도 냉정한 늙은 하인의 얼굴로 향한다.

현실적으로 유디트의 칼이 원인이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에서 분출되는 피는 그 결과이다. 하지만 그림에서 시간적 경과는 그러한 인과관계의 순서로 전개되지 않는다. 끔찍한 피의 분출로부터 유디트의 겁에 질린 얼굴로 이어진다.

카라바지오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단순히 구약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모티브일 뿐이다. 잔인한 분출의 장면으로부터 겁에 질린 여인의 얼굴로 소급되는 과정, 잔인함과 공포의 공존, 폭력과 에로티시즘의 뒤섞임이라는 인간에게 매우 보편적인 경험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홀로페르네스의 검은 얼굴과 늙은 하녀의 검은 얼굴, 유디티의 치마, 배경이 되는 커튼의 어두운 색과 유디트의 얼굴, 베개와 침대 커버, 유디트가 입은 상의의 밝은 색이 명확한 대조를 이루는 것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 시간은 역사적인 사건의 흐름이 아닌 방식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이질적인 시간의 구성을 통해서 관객은 극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다.

미디어 아트는 뉴미디어를 활용한다는 특성 때문에 과거의 회화와는 달리 시간을 담는 것이 매우 용이하다. 아니 어쩌면 미디어 아트를 전통 회화와 구분짓는 본질적인 특성 중의 하나가 시간일지도 모른다. 미디어 아트의 초기에 주로 활용되었던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만 하더라도 전통회화와 달리 움직이는 영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 중 한사람인 백남준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러한 특성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회화도 조각도 아닌 시간예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회화와 음악, 그리고 퍼포먼스는 다른 장르가 아닌 하나의 것이었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 시간을 기록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기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시간을 해체하여 전혀 이질적인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극단적으로 화면에서 어떤 시간적인 사건의 흐름도 없애버리는 경우까지 있다.

백남준의 작품 <영화를 위한 선 Zen for Film>(1962-4)은 아예 아무런 촬영도 하지 않고 현상도 안 된 16mm 필름 자체를 30여 분간 스크린에 상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고 피아노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존 케이지의 작품 <4분 33초>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영화가 미리 짜놓은 각본을 통해서 관객을 몰입시키기보다는 관객에게 끈임 없이 명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발적인 현장 상황이나 영사도중 생기는 스크린상의 예기치 못한 흠집 외에는 어떠한 스토리 혹은 이미지도 배제된 이 작품에서 시간은 어떤 일관된 흐름도 지니지 않는다.

댄 그래엄(Dan Graham)의 <시간이 지체된 방 Time Delayed Room>(1974)는 미디어를 활용한 설치작품이다. 서로 분리된 두 개의 방에는 각각 두 개의 스크린이 있다. 두 개의 스크린은 같은 벽면에 나란히 설치되어 있으며, 각 방에는 방 전체의 모습을 비추는 폐쇄회로 카메라가 있다.

나란히 설치된 두 개의 스크린 중 하나의 스크린은 스크린을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으며, 다른 하나의 스크린은 다른 방의 모습을 담고 있다. 따라서 관객은 스크린을 보는 자신을 볼 뿐만 아니라 다른 방에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제목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관객은 스크린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스크린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8초전에 찍힌 모습이다. 물론 다른 방의 모습을 담은 스크린은 실시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은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낳는다.

관객은 스크린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과 스크린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미 시간적으로 지나간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동시에 관찰하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방에서는 실시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는 다른 방에 있는 관객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기도 한다.

스크린상의 자신과 관찰하는 자신의 동일시, 스크린상의 자신에 대한 관찰자의 시점, 다른 방에 있는 관객에 의해서 관찰당하는 피관찰자의 시점 등 다양한 시점이 공존한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단순히 일어난 시간적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다.

8초전 과거의 자신과 과거를 관조하는 현재의 자신, 그리고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예상하는 예측의 시선, 이 모든 시간들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미디어 아트는 전통예술이 나타내기 어려운 시간의 다양한 공존을 매체의 도움으로 분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