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국 이상 참여 춤, 공연, 놀이로 변주되는 지구촌 환경보호운동

"지금 당장 컴퓨터를 끄세요."

최강 검색 포털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가 지난 해 펜실베니아 대학 졸업생들을 앞에 두고 꺼낸 말은 '뒤처지지 않는 정보력만이 살길'이라든가 '검색의 생활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컴퓨터를 끄고 휴대폰을 내려 놓은 뒤 주변에 인간이 있음을 발견하라고 말했다.

생명의 탄생, 그리고 이어지는 지루하고 신기한 성장, 매년 다시 돌아오는 봄 같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돼 온 이 당연한 일들 속으로 뛰어 들라는 것이다.

이 뻔한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막상 개인의 삶과 부딪쳤을 때는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은 알 수 없는 폭발과 같은 기쁨을 생성한다.

작년 캐나다 토론토시의 어스 아워 전후
폭발의 파편은 여기저기로 튀어 감수성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상승시켜 비로소 인간의 냄새를 풍기게 만든다. 정보화 사회의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리더 중 한 사람인 슈미트에 따르면 지금은 컴퓨터 앞에 달라 붙어 초 단위로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디지털 벌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2010 트렌드 웨이브>에서는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로 '디지털 디톡스'를 꼽았다. 꼼꼼히 쳐진 인터넷 망에 걸려 하루 종일 아이폰만 만지작거리느라 온 몸 구석구석에 찌든 디지털 독소를 빼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반소비주의, 반세계화 성향을 띠는 캐나다의 문화운동네트워크 애드버스터는 지난해 완벽한 '언플러그드 라이프(unplugged life)'를 선언했다.

일주일 간 트위터, 페이스북 등 일체의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금지하고 게임기와 TV의 코드를 빼버린 채 디지털 금욕 기간을 가진 것. 물론 이런 고난의 길을 걷지 않더라도 좀 더 손쉬우면서 생색은 엄청나게 나는 환경 보호 방법도 있다.

3월27일, 모두 다 쉿!

지난해 3월 28일 토요일,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차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1시간 동안 조명을 끄고 어둠 속에서 지구를 생각한다는 취지의 이 운동은 2007년 호주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첫 해는 시드니의 220만 가정과 기업만이 참여했지만, 손가락만 한 번 까딱하면 되는 간단한 매뉴얼 덕에 곧 국제적인 환경 보호 운동으로 자리잡아 그 다음해인 2008년에는 35개국이, 그 다음해에는 88개국, 총 4000개의 도시에서 전등을 껐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부터 서울시와 창원시가 동참해 3월28일 저녁 8시반, 남산타워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2010년 어스아워에는 전세계 10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동참 의사를 전달해왔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서울의 한강 다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두바이 부르즈칼리파 빌딩이 모두 한날 한시에 어둠 속에 잠기게 된다.

어스 아워는 물론 1시간 동안 사용할 전기를 절약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불을 끄는 행위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효과는 불을 끈 사람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비주얼'하기 때문이다.

오감 중 가장 기본인 시각의 차단은 소리의 차단이나 금식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한 각성 효과를 가져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좀 더 거시적인 생각들 - 급속히 녹고 있는 빙하나 때아닌 폭설, 이유를 알 수 없는 지진, 해일 등 지구가 보내는 신호에 좀더 손쉽게 귀 기울일 수 있게 해준다.

9시 30분이 되면 다시 불을 켜고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전 세계가 같은 시간에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이후에 이어지는 일상의 구석구석을 참견하게 된다.

불 꺼진 남산타워가 들려주는 이야기

어스 아워에 참가하는 국가에서는 불을 끈다는 행위에 착안한 재미있는 행사들을 기획하고 있다. 2010년 월드컵 개최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조명을 끈 '암흑 속의 축구'가 열릴 예정이다.

물론 정식 경기가 아닌 친선 경기인데 어둠 속에서 뛰다가 부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공, 골대, 경기장 라인을 비롯해 선수들의 번호판, 양말, 운동화 끈까지 모두 야광 제품을 사용한다고 한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화려한 축구쇼가 될 듯하다.

러시아에서는 세계적인 타악연주그룹인 스톰프가 언플러그드 콘서트를 펼친다. 어스 아워를 주최하는 WWF(세계자연보호기금)의 러시아 지부에서는 3월27일 당일 가족들이나 친구들끼리 모여서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생활 용품들을 활용해 타악 연주를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주어 다 함께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필리핀의 한 광장에서는 100여명의 사람이 어스아워 플래시 몹에 참여했다. 나른한 오후, 한가로운 광장에 갑자기 음악이 울려 퍼지더니 몇 명의 젊은 남자들이 뛰어나와 공중 2회전 덤블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곧이어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3분여간 신나게 춤을 추고 마지막으로 불을 끄는 시간인 60분을 의미하는 숫자 '60'으로 대형을 만든 다음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도 어스 아워를 지지한다. 구글은 심플한 대문을 고수하는 대신 흥미로운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홈페이지 디자인에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지난해 3월28일에는 불 꺼진 새까만 초기화면으로 네티즌들을 맞았다.

컴컴한 화면에 구글의 알록달록한 로고만 형형하게 빛나는 가운데 아래에는 "우리는 불을 껐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We've turned the lights out. Now it's your turn)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번에는 네이버가 한국 어스 아워의 홍보 후원을 맡게 된 만큼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세르비아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인물을 어스 아워 홍보대사로 지정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기상업화의 선구자로 생전에도 더 새롭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우리도 국내 어스 아워를 홍보할 인물을 조상님 중에서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불을 끄고 떡을 썬 한석봉의 어머니는 어떨까?

이번 년도부터는 한국에서도 적극적으로 어스 아워를 지지한다. 도시와 기업의 참여가 부쩍 늘어 서울, 창원에 이어 부산, 대구, 광주, 경기도, 강원도 전체가 참가 의사를 밝혔고 글로벌 기업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참여한다. 맥도날드는 당일 전국 239개의 매장에서 그 유명한 노란색 'M'의 네온사인을 끄기로 했다. 물론 장사를 해야 하니 소등 시간은 5분으로 한정했다. 스타벅스도 300개 매장의 불을 끈다. 일부 매장에서는 촛불을 켜놓고 무료 커피 강의 및 테이스팅을 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어스 아워 한국지부는 청계천이나 광화문 등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소등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양초 만들기 행사나 촛불 행진 등을 많이 하지만 한국에서는 촛불이 가진 의미가 다양한 만큼 대신 시민들과 함께하는 통기타 공연 등을 열 계획이다. 충무로 한옥마을에서는 카운트 다운과 함께 정각 8시 30분에 맞춰 모형 스위치를 내리는 퍼포먼스가 벌어진다.

누구도 디지털 시대로의 질주를 막을 수는 없다. 어스 아워가 끝난 다음 날 불 꺼진 도시의 비포 앤 애프터 사진을 감상하는 곳도 인터넷, 애드버스터가 언플러그드 라이프와 그들의 문화 행사를 홍보한 곳도 인터넷이다. 중요한 것은 지구 전체가 공유해야 할 경각심에서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3월27일, 불을 끄는 간단한 손짓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가능해진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