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4) 영화 <지옥의 묵시록> 속 <발퀴레의 기행>미군들의 베트콩 마을 무차별 공격 장면에 나오는 곡 극적효과 압권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다. 바그너의 후손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사재를 털어 바그너의 오페라가 공연되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바그너 음악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도 있다. 바로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수용소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수용소에 있을 때,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바그너의 음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바그너의 음악 중에는 듣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발퀴레의 기행(騎行)>이라는 곡이 바로 그런 곡이 아닐까 싶다.

<발퀴레의 기행>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중 제2부 <발퀴레>에 나오는 전주곡이다. <니벨롱엔의 반지>는 모두 4부작으로 나흘에 걸쳐서 공연하게 되어 있다. 첫째 날 <라인의 황금>, 둘째 날 <발퀴레>, 셋째 날 <지그프리트> 넷째 날 <신들의 황혼>이 공연된다.

발퀴레는 신들의 주신(主神) 보탄이 지혜의 여신 에르다를 통해 낳은 아홉 명의 아가씨들을 말한다. 이들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전쟁터를 날아다니며 부상당한 전사들을 방패에 태워 발할성으로 옮겨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발퀴레의 기행>은 이 음악극에서 3막이 시작되기 전에 연주되는 전주곡인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발퀴레의 기이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금관 악기 소리가 인상적이다.

'날개 달린 말'과 '날아다니는 신의 딸'들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은 이 오페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킨다. 이 곡의 우리말 제목이 말을 타고 다닌다는 의미의 기행(騎行)이지만 사실 이것은 기행(奇行)이기도 하다.

이런 비현실적인 공간에서는 음악도 기존의 것과는 다른 기이하고 신비로운 것이어야 하는데, <발퀴레의 기행>은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 줄 만큼 충분히 기이하다. 금빛 광채로 빛나는 금관악기의 팡파레는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세계의 소리처럼 들린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바로 <발퀴레의 기행>이 나온다. 미군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평화로운 베트콩 마을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을 때 바로 이 곡을 틀어놓는다. 이유는 베트콩에 겁을 주기 위해서란다. 미군들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바그너의 음악이 발산하는 섬뜩한 살기를. 그 뒤에 숨어 있는 반인륜적인 잔인함을.

비록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미군의 행동은 거의 무차별적인 테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헬리콥터 위의 미군들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서로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윈드서핑하기에 파도가 좋다는 식의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마치 장난하듯이 살육을 감행한다.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틀어 놓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살육의 참혹함을 부각시킨 이 장면에서 <발퀴레의 기행>이 발산하는 극적효과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렇게 반유대주의자인 바그너 음악을 틀어놓고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하던 미국은 지난 2001년 9월 11일, 또 다른 부류의 반유대주의자들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 경제의 심장부인 국제무역센터를 향해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돌진하는 비행기를 보면서 문득 <지옥의 묵시록>의 살육 장면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반인륜적인 학살과 구국(救國)의 영웅적인 행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퀴레의 기행>과 같은 바그너의 음악은 반인륜적인 학살마저도 영웅적인 행위로 바꾸어놓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정치보다 더 위험하다.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