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 총 30권으로 완간

시인 고은(77)의 연작시편 <만인보>가 전30권으로 완간됐다.

1980년 여름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구상을 시작해 만 30년 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린 것. 1986년 첫 권이 나온 이래 25년 만의 완간이다.

세계 시단에서도 '오늘날의 문학에서 가장 비범한 기획'(Robert Hass)이라 평가받는 <만인보>는 말 그대로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다. 총 작품 수 4001편, 조연급 정도만 포함해도 등장인물은 5600여명에 이른다.

4001편, 5600여 명의 등장인물

"만인보는 제가 개척한 기록을 넘어 고전 서사세계의 해외적 장르로 정착되기를 기대합니다."

9일 기자들과 만난 고은 시인은 <만인보> 완간 소감을 말했다. "(경기도 자택에서) 오늘도 버스 타고 오셨느냐?"는 질문에 "버스와 지하철 갈아타고 왔어요"라고 소박하게 말한 고 시인은 미리 준비한 소감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귀납과 연역이라는 것, 서사와 서정, 서술과 묘사, 개혁과 상상, 문학과 역사, 현실과 허구, 마지막으로 시와 시가 아니라는 것, 이것의 합심이 <만인보>의 세계입니다. 시는 우주 만상의 화합이라 믿고 있습니다. <만인보>는 인간의 어떤 곳을 넘어 만물보로 나아감으로써 인간과 우주에 기여하길 꿈꿉니다."

<만인보>는 시인 고은이 겪은 한국 근현대사의 서사시다. 1~3권(초판: 1986년 11월)과 4~6권(초판: 1988년 11월)은 시인이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 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고 밝힌 것처럼 고향사람들의 이야기가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7~9권(초판: 1989년 12월)에 이르면 1950년대의 가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스쳐간 사람들을 불러낸다. "멋쟁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7권), '삼일천하'의 김옥균(7권), "감격 없는 시대를/감격으로 마치고자" 했던 "애오라지 시인적인 시인" 임화(8권),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섰던 '백정' 박성춘(8권), "첫사랑이 공산주의였"던 "고독의 혁명" 빨치산 대장 이현상(9권), "나라가 할 일/혼자의 엄두로 해내고" 사라져버린 고산자 김정호(9권) 등 역사 속의 인물들은 시공을 넘나들며 당대의 삶을 비춘다.

이후 7년간의 공백을 거친 뒤에 나온 10~12권(초판: 1996년 11월)과 13~15권(초판: 1997년 6월)은 주로 '70년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시인과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이다.

"하얀 머리칼/하얀 수염/하얀 두루마기/하얀 고무신"차림의 함석헌(10권), "7백만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10권), "죽음으로 싸움을 이끌었"던 장준하(10권), "8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가장 젊은 사람"이었던 문익환 목사(11권), "한 걸음도 조심스러운 언론인"에서 "역사의 사람"으로 거듭난 송건호(11권), "어느 때나 곱게 웃으며 오는" 신경림(11권), "남에게 한 가닥 감정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엄밀한" 백낙청(12권) 등 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동지들이 시인의 프리즘을 통해 드러난다. 저 반대 쪽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성난 독사" 박정희(11권)를 비롯해 "결코 어리석지 않은 배불뚝이" 김형욱(11권), "박정희교의 수제자" 이후락(13권) 등이다.

다시 또 7년간 공백 뒤에 다섯 권이 동시에 출간된 16~20권(초판: 2004년 1월)은 식민지시대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인간 군상을 다룬다.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 이형근(16권), "나라의 불행"과 "나라의 모순을 잘 쓰고 남"긴 이승만(18권), 그 "이승만의 집사" 이기붕(19권), "섬세한 독신 여인"이었다가 극한 상황에서 "잔인한 독부"가 되어버린 노천명(20권), 등이다.

21~23권(초판: 2006년 3월)은 "하나의 죽음이/혁명의 꼭지에 솟아"오른 김주열(21권) 등 4․19혁명기를 배경으로 한다. 24~26권(초판: 2007년 11월)에서는 고승들의 삶과 행적을 좇으며 한국불교사를 복원해낸 점이 주목할 만하다.

어떤 평가 받나?

<만인보> 완간을 마무리하는 신간으로 662편을 담은 27~30권(2010년 4월)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다룬 '봉하 낙화암'을 비롯해 당대의 인물들(문정현 안선재 김신용 등)이나 역사의 이면에 존재한 인물('약횡')들을 다룬 시들과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시들('함석창', '백씨', '현영섭', '박상현', '박춘금' 등)이 담겨 있다.

특히 이번 신간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시편들은 5·18 광주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감옥에서 구상한 <만인보>의 종착지가 광주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광주 시편들은 잔혹한 장면들의 가감 없는 묘사로 당시의 참혹함을 전해주는 한편 인간의 광기와 폭력성을 밑바닥까지 파헤쳐 부당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고통과, 항쟁 이후 이어지는 그들의 아픔과 지옥 같은 일상의 묘사('인배', '인배 어머니' 등)는 문학작품만이 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다.

"이후 만인보란 이름으로 또 시를 발표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시인은 "강박적 약속은 하지 않겠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대답했다.

출판사 창비는 완간을 기념해 기존에 출간된 1~26권을 출간 시기별로 합본하고 여기에 신간 27~30권을 더하여 11권의 양장본과 부록 1권을 묶어 전집으로 출간했다. 시인은 2009년 7월 신간원고를 탈고한 이후 전집 출간에 맞추어 약 8개월에 걸쳐 역사적 사실관계와 인명 착오 등 기간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4000편이 넘는 작품을 일일이 손을 보았다.

이 30년 장정이 가진 의미란 무엇인가.

문학평론가 염무웅 씨는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개인사와 민중사의 복합적 대서사>를 통해 "<만인보>는 여러 가지 점에서 새롭고도 파격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4000편 가까운 수록작품들 모두가 개별 작품으로서의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인보>는 복수명사이지만, 동시에 4000여 편 전체가 느슨한 대로나마 하나의 단일한 기획 아래 일종의 서사적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단수명사이기도 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현재 <만인보>는 2005년 영어 선집 Ten Thousand Lives (LA: Green Integer Press 2005) tr. Brother Anthony at Taizé, Kim Young-Moo & Gary Gach 와 스웨덴어 선집 Tïotusen fotspår och andra dikter (Stockholm: Atlantis 2005) tr. Han In-Ja & Carola Hermelin이, 2007년 프랑스어 선집 Dix Mille Vies (Paris: Belin 2008) tr. Chung Ye-Young & Laurent Zimmermann이 출간되었고, 러시아어 선집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영어 선집은 2007년 노스 캘리포니아 번역도서상을 수상했고, 스웨덴어 선집은 스웨덴의 유력일간지 스벤스카 다그블라더트(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이자 아시아권 도서 가운데 최초로 스웨덴 중등학교 외국문학 부문 교재 '영원한 고전'의 한 권으로 선정되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