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7)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 속 드뷔시의 <달빛>남녀사이 애정이 싹트고 있음과 금빛 샌들에 대한 동경과 꿈을 암시

트란 안 홍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다. 말을 최대한 아끼고 느리고 조용한 카메라 워킹과 소리, 음악으로 모든 것을 암시한다.

배경은 50년대 베트남의 사이공이지만 감각은 지극히 프랑스적이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감독이, 프랑스에 세트를 차려놓고 찍었다고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열 살의 어린 소녀 무이. 어린 무이는 한 부잣집의 종으로 팔려간다. 비록 종이지만 이 집의 마님은 무이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비슷한 또래의 딸을 병으로 잃은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스무 살이 된 무이는 마님 집을 떠나게 된다.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무이를 거둘 수 없게 된 마님이 무이를 큰아들 트렁의 친구인 쿠엔의 집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무이의 새 주인 쿠엔은 넓은 집에 혼자 살면서 작곡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어려서부터 쿠엔을 남몰래 사모하고 있던 무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지만 간간이 흐르는 드뷔시의 <달빛>은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싹트고 있음을 암시한다. 무이는 나긋나긋한 식물성 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장만하고, 그것을 쿠엔의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놓는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처럼 기름기를 뺀 피아노의 산뜻한 울림이 쿠엔에 대한 무이의 순진무구한 사랑을 얘기한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에게는 늘 약혼녀가 있게 마련이다. 쿠엔에게도 멋지고 세련된 약혼녀가 있었다. 그녀는 쿠엔의 집에 수시로 찾아와 연인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치곤 하는데, 이런 그녀를 무이는 자기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순진무구한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그 순진무구한 호기심은 무이가 쿠엔의 약혼녀가 벗어놓은 금빛 샌들을 발가락으로 살짝 건드려 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금빛 샌들. 가난하건 부자이건 배웠던 못 배웠건 젊었건 늙었건 여자라면 누구나 꾸는 꿈이 있다.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 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로 들어가는 꿈이다. 이것은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세상 모든 여자들의 공통된 꿈인데, 여기서 금빛 샌들은 바로 그런 꿈을 상징하고 있다. 무이가 발가락으로 금빛 샌들을 살짝 건드려보는 바로 그 순간 드뷔시의 <달빛>이 흐른다.

이 곡을 작곡한 드뷔시는 음악사에서 인상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미술에서처럼 여러 화가가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음악의 인상주의는 거의 드뷔시 혼자 창안해 낸 독창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분위기의 음악'이다. 드뷔시가 음악을 통해 무슨 얘기를 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그는 절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단지 '암시'할 뿐이다.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가 그런 것처럼.

애매모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포착하기 힘든 세계의 신비로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묘한 흐름, 기본적인 강세의 법칙은 무시되고, 마디의 분절점은 베일에 싸이고, 멜로디는 한 마디에서 다음 마디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덧없는 화성과 미묘한 음색, 베일에 싸인 색조의 혼합과 감지할 수 없는 어렴풋한 빛. 바로 이런 것이 드뷔시 음악의 특징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무이가 발끝으로 살짝 건드린 금빛 샌들은, 그리고 그 순간에 흘러나오는 <달빛>은 금빛 샌들에 대한 루이의 동경과 꿈이 그렇게 절절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저 순진무구한 호기심, 드뷔시의 음악처럼 그렇게 가벼운 터치의 호기심일 뿐이다.

무이가 쿠엔의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약혼녀의 립스틱 역시 금빛 샌들과 같이 새롭고 예쁜 것에 대한 여성적인 호기심을 반영한다. 이때 연주되는 드뷔시의 <달빛>은 무이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그린 파파야 향기처럼 산뜻하고 감미로운.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