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서울연극제정극, 융합예술, 다원 퍼포먼스 등 다양하고 참신한 작품들

'부활, 그 다음'
지난해 서른 살을 맞은 서울연극제가 격동의 청년기를 마무리짓고 미래를 내다보기 시작했다.

지난 23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연습실에서 열린 에서 연극제 관계자들은 올해 공연작을 발표하며 이 같은 결의를 다졌다.

올해 서울연극제의 전체적인 방향은 '미래'에 맞춰져 있다. 이번 공식참가작 8편 중 7편이 창작극으로 선정됐고, 6편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미래야 솟아라'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오르는 등 미래지향적인 색깔이 강해진 것.

박장렬 서울연극협회 회장 역시 "올해는 특히 자유롭고 실험적인 무대를 많이 마련해서 축제의 성격이 한층 더 젊어졌다"고 설명했다.

미래지향으로의 예견된 변신

'옥수수밭에 누워있는 연인'
이러한 변신은 지난해 행사에서 이미 예견된 바 있다. 2009 서울연극제는 과거에 작품성을 인정받은 창작극을 엄선해 다시 무대에 올리는 기획으로 전개됐다. 그런데 총 9편의 선정작 가운데 1980년대 작품이 4편, 1990년대 작품이 3편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2000년대 작품은 2편에 불과했다.

당시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배우 이호재는 이를 두고 "1980~1990년대에만 연극이 만들어진 것인가. 연극 발전을 위해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며 연극계의 현실을 성토하기도 했다. 이는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환경도 있지만 현재에의 고민과 미래에의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연극계 내부의 자기반성에 다름없었다.

올해 서울연극제의 미래지향으로의 변신은 이러한 대학로의 고민을 철저히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행사가 그동안 공연된 우수작을 돌아보는 자리였다면, 올해의 키워드는 '창작'과 '실험'이라고 할 만하다. 대학로의 장기공연을 통해 너무 익숙해진 작품은 배제하고 지속적인 작업을 해온 극단 중심으로 작품을 선정한 것. 그 결과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번역한 극단 실험극장의 <심판>(구태환 연출)을 제외한 나머지 7편은 모두 창작극으로 구성됐고, 그중 4편이 초연작으로 선정됐다.

28일 가장 먼저 공개되는 극단 완자무늬의 <부활, 그 다음>(오태영 작, 김영수 연출)과 뒤를 이은 극단 우투리의 <리회장 시해사건>(김광림 작ㆍ연출)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부활, 그 다음>은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우리들의 몸부림을 그린다.

<리회장 시해사건>은 재벌 총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장례식과 사망 1주일 전의 사건을 모자이크 식으로 그리며 한국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 알려진 <날 보러와요>를 쓴 김광림 작가의 신작으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내일은 챔피온'
애플씨어터의 <내일은 챔피온>(전훈 작ㆍ연출)과 극단 창파의 <옥수수 밭에 누워있는 연인>(지경화 작, 맹승훈 연출)도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창작극이다. 사실주의를 넘어 극사실주의를 표방하는 <내일은 챔피온>은 마치 창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듯 우리 이상의 모습을 그대로 무대에 옮겼다. 다방, 미용실, 권투도장, 중국집으로 이뤄진 상가건물의 일상이 희망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삶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감없이 드러난다.

반면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려지는 <옥수수 밭에 누워있는 연인>은 비정하면서도 비극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설파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극 중 등장하는 나비를 통해 절대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선을 보여준다.

이밖에 극공작소 마방진의 <들소의 달>(고선웅 작ㆍ연출), 극단 은행나무의 <홍어>(전경진 작, 김성노 연출), 극단 이루의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손기호 작ㆍ연출) 등이 다시 한 번 관객과 만나게 됐다.

올해의 주인공은 '미래야 솟아라'

하지만 올해 서울연극제의 가장 큰 특징은 공식참가작들보다 오히려 6편의 새로운 실험무대에 있다. 연출가, 작가, 배우들이 함께 모여 다원 퍼포먼스 등 독특하고 실험적인 공연을 중심으로 만든 미래연극개발프로젝트 '미래를 솟아라'가 그것. 총 60개의 신청작 중 엄선된 '미래야 솟아라'의 선정작들은 씨어터제로의 <홀맨>을 시작으로 5월 17일부터 엿새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미래야 솟아라 '세미녀 이야기'
3D 입체영상이 현실화된 세상에서 오직 몸으로 '때워야 하는' 원시적인 예술 장르로서의 연극의 갈 길을 묻는 <홀맨>(정재진, 심철종, 박효주 작, 심철종 연출)은 정통연극과 퍼포먼스의 크로스오버로 표현된다.

춤을 무대언어의 기본으로 하여 독창적인 공연형식을 선보여온 무브먼트 당당의 <떠나는 사람들>(김민정 작ㆍ연출)은 수년간 함께 작업해온 무용수와 배우들의 몸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신선한 형식을 모색한다. 첨단 영상 기술과 춤과의 연대는 공연예술계의 현안으로, 서울연극제의 태도 변화를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극단 인의 <잃어버린 시간들>(박성준 연출)은 3개의 원작이 무대 위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이색적인 실험으로 눈길을 끈다. 송종헌의 <세속도시에서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과 머레이 쉬스갈의 <타이피스트>의 작품을 연결시켜 세 작품 사이의 점점을 찾는다. 그동안 여러 극단들이 하나의 주제를 두고 공동으로 공연하거나 반대로 다른 작품으로 함께 공연하는 것이 전례였다면, 이번 극단 인의 실험은 그 중간쯤의 형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목을 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변화를 시도하고 실험을 해도 관객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헛일. 그래서 올해 서울연극제는 일반 관객들의 참여 유도를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일반인이 직접 심사하는 '관객평가단'과 행사 운영을 돕는 '자원봉사단'으로 시민참여의 기회를 늘리고, 객석 일부를 1만원에 판매해 티켓당 1천원을 기부하는 '미소티켓'으로 이슈를 만들 예정이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여한 극단 실험극장 이한승 대표와 극단 완자무늬 김태수 대표는 "뜻깊은 사업인 만큼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며 관객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그동안 춤과 퍼포먼스 등 인접 장르를 포괄하지 않는 연극제는 연극인들만의 축제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31회째를 맞아 '시민들과 함께하는 축제'가 되기 위한 변신을 시작하는 서울연극제의 행보는 많이 늦었지만 그래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정극, 융합예술, 다원 퍼포먼스 등 다양하면서도 참신한 작품들로 채워진 올해 행사로 인해 서울연극제의 미래를 가늠해보는 것도 하나의 관람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제31회 서울연극제 기자간담회


송준호 기자 ris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