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사진의 거장 '기 부르댕' 전폭력과 에로티시즘의 작가 핵심 작품 75점 선보여

사.지.절.단
여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밀가루처럼 허연 여인의 허벅다리에는 생명이 없다. 나머지 신체는 그저 앵글 밖으로 밀려나간 것 같아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앵글을 더 확장해도 엉덩이 위쪽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잘려 나갔겠지.

패션 사진에서의 에로티시즘은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 헬무트 뉴튼, 테리 리차드슨, 데이비드 라샤펠… '포르노 시크'라 불리는 이 사조에 기 부르댕도 함께 분류되곤 한다.

눈부시게 하얀 나체, 찰떡 같은 엉덩이, 검은 스타킹, 아크로바틱한 체위, 빨간 립스틱 등 섹시함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클리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러나 그를 에로틱한 패션 사진으로만 분류할 수 없는 이유는 주객이 전도된 듯한 구도와 풍부한 색감의 대비, 그리고 이것들의 기저에 깔린 무시무시한 폭력성 때문이다. 부르댕은 여성의 신체에 대단한 매력을 느낀 것이 틀림 없지만 아름다운 것과 아껴주는 것을 완전히 별도로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모델을 구겨서 접고, 차로 치고, 거꾸로 매달고, 아예 배경에 파묻어 외면해 버렸다. 목 위로 또는 허리 위로 잘라 버리는 것도 예삿일. 완벽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다리는 앵글에 베여 공산품처럼 나뒹굴거나 욕조에 거꾸로 꽂혔다. 붉은 색을 쓰고 싶으면 각혈하게 하거나 젖꼭지에서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모델 중 아무도 웃거나 울지 않는다. 부르댕 사진 속 여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지독하게 세련된 페티시

그의 퇴폐성과 잔인성이 예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선명한 색감과 현실을 벗어난 구도 덕이 크다. 컴퓨터는커녕 TV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그때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싯푸르게 표현된 바다와 하늘, 새빨간 볼터치와 입술은 팽팽하게 대치하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일상에선 나오기 힘든 포즈, 주인공을 배경처럼 잡은 구도 역시 어쩐지 현실감을 떨어뜨려 죽음을 슬픔의 영역에서 패션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역할을 한다. 혹자가 그의 작품을 두고 dead chic(데드 시크: 죽음의 미학)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192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기 부르댕이 처음 발표한 작품은 사진이 아닌 그림이었다. 20대 초반에 자신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서른이 되기 전 그가 찍은 사진이 프랑스 보그에 실리면서 패션 사진가로서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60년대 후반 찰스 주르당과 작업한 광고 사진으로 폭력과 에로티시즘이 결합된 기 부르댕의 작품 세계가 확고해지자 70년대에 이르러 전 세계의 패션 잡지가 그의 사진에 목을 매게 되었다.

지금 텐꼬르소꼬모에서 열리고 있는 기 부르댕 전시는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첫 번째 시도다. 그의 작업 중 가장 중요한 시기를 포착한 사진집 'A Message for You'의 1편에 수록된 사진 75점은, 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패션 사진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까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기 부르댕 작품 세계의 요약판이다. 유명한 찰스 주르당의 광고 사진, 펜탁스 캘린더, 베르사체의 광고 캠페인을 비롯해 미 발표된 작품들도 소개된다.

전시장에서는 사진뿐 아니라 1960년~1980년 당시 부르댕이 작업한 패션 촬영장을 찍은 영상도 함께 볼 수 있다. 8mm와 16mm로 촬영된 미공개 영상은 작가가 영상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 외에 거장의 독특한 시각과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방을 둥글게 감싼 8개의 파노라마 프로젝션과 반사되는 효과를 활용한 거울 방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설치물로, 기괴하고 퇴폐적인 작가의 세계를 뒤흔들어 한층 색을 짙게 만든다. 영상은 전시를 위해 특별히 편집된 것으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적어도 올해 안으로는 다시 전시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청담동 텐꼬르소꼬모 10층. 5월2일까지. 입장료는 무료.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