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이라는 배설물과 또 다른 배설물

피에르 만초니, 예술가의 똥, 1961
많은 스캔들로 점철된 20세기 미술사에서 뒤샹의 변기만큼이나 파격적인 사건이 있다. 1961년 피에르 만초니(Piero Manzoni)는 자신의 똥을 90개의 작은 깡통에 담아서 밀봉하였다.

이 깡통의 윗부분에는 만초니가 제작했다는 서명과 함께 시리얼넘버(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리고 옆면에는 '예술가의 똥, 정량 30그램, 원상태로 보존됨, 1961년 5월 생산되어 깡통에 넣어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예술가의 똥'(Merde d'Artiste)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단순한 해프닝 이상의 의미를 지닌 만초니 자신의 예술관을 반영한다.

그는 20세기 사회에서 예술이 더 이상 어떤 구원이나 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큰 영향을 받았던 이브 클랭마저도 서슴치 않고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클랭은 비록 20세기 사회를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조롱하였으나, 여전히 자신이 예술가라는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자신의 작업을 신비화하였기 때문이다.

만초니는 말 그대로 예술가의 예술품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20세기 이후 미국의 미술계를 지배하였던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와 키치에 대한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리히텐슈타인, 붓질, 1965
그린버그는 제목 그대로 '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글에서 20세기 이후의 예술을 두 가지의 상반된 범주로 구분하였다. 그 하나는 예술가의 자의식이 담긴 아방가르드 예술이며 다른 하나는 대중문화와 동일한 저급한 대중예술이다. 간단히 고급예술과 저급예술로 구분될 수 있는 그린버그의 잣대에 따르면 20세기 예술은 아방가르드와 키치 둘 중의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키치는 진정한 예술로 간주되지 않는다.

실제로 20세기의 미국 작가들은 그린버그의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의 작업이 키치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만초니의 작업은 그러한 구분 자체를 아예 무의미하게 만든다. 아방가르드건 키치건 모든 예술품은 하나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똥(Shit!)이다.

아방가르드와 키치 따위의 구별 자체를 무시한 만초니의 '똥'과 달리 팝아트는 그 구분 자체를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팝 아티스트들은 이 구분을 이미 염두에 두고, 이 구분을 넘어서려고 하였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와 키치, 혹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분은 팝 아티스트들에게 무시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들은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은 고급과 팝의 구분을 없애고 무시하려 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의 작품이 키치로 전락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만화나 광고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작업을 하였다. 그의 작업은 커다란 사각형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로드코나 지적으로 숭고함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바넷 뉴먼과 같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붓질을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리틀 빅 페인팅'(Little Big Painting)은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붓질을 희화화하고 있다. 이른 바 커다란 '색면'(Color Field, 뉴먼, 로드코, 존스, 라우셴버그 등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이 커다란 몇 개의 색면으로 화면을 구성한데서 유래한 말)을 칠하는 생생한 붓질의 이미지가 아이러니하게도 통속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Look Mickey, 1961
리히텐슈타인은 여기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심각하고도 지적인 붓질을 키치의 이미지로 환원함으로써 그들의 작업을 조롱하는 듯 보인다. 고급스러운(?) 예술작품의 이미지가 기계에 의해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대중적인 이미지로 둔갑한 것이다.

하지만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을 보면 정작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그가 디즈니 만화를 복제하여 회화로 만든 방식을 보면 매우 복잡하며 결코 기계적이지도 않다. 그는 만화에서 뽑은 장면을 스케치하고, 그것을 실물 투영기로 확대해 캔버스에 전사시킨다.

그 다음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스텐실, 채색, 윤곽선 등을 사용하여 캔버스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일련의 작업과정은 먼저 만화 장면의 스케치라는 수작업, 그 스케치된 이미지의 전사라는 기계작업, 다시 전사된 이미지를 그리는 수작업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수작업과 기계작업이 얽혀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 자체 역시 기계작업과 수작업이 교묘하게 얽혀져 있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기계작업과 수작업을 교묘하게 섞은 것은 단지 리히텐슈타인만이 아닌 워홀을 포함한 팝아트 작가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팝아트가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뒤섞음으로서 그 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들고자 한 것은 처음부터 그러한 구분 자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달리 보면 팝 아티스트들은 세상을 커다란 화장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만초니의 배설작업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병호, Silent Pollen, 2007
만초니가 배설물만 쏟아내는 데 관심을 두는 것에 반해, 이들은 그러한 고급이든 저급이든 모든 배설물들이 미학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데 주목을 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고급스러운 똥과 저급한 똥의 구분이 없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똥 자체를 더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키치와 고급문화, 혹은 저급한 똥과 고급스러운 똥의 구분은 미디어 아트가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디어 아트 자체가 미디어에 기반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린버그가 키치의 원흉으로 지목한 것도 바로 대중매체이다.

따라서 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 키치와 고급예술의 문제의식은 하나의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과제이기도 하며, 만초니처럼 냉소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디어 아트는 상품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미디어 아트가 미디어라는 기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일부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마치 키치를 두려워한 모더니스트들처럼 엔지니어와 거리를 취하고 자신들을 예술가로서 구별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예술가로서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 표현일 뿐이다. 미디어 아트의 가르침은 이들의 노력이 이미 20세기 이후에 똥덩어리로 전락한 예술의 위상을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병호의 작업은 오늘날 예술이 처한 현실 자체를 매우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마치 하나의 '제품'(product)으로 만들어낸다. 제품이란 판매하기 위한 상품의 의미도 있지만, 미술사적으로 보자면 '레디메이드'(기성품, Ready-Made)와도 다른 것이다. 기성품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예술작품으로 차용하는 것이다.

이는 일상적인 사물들과 예술품의 구분이 허무는 전략의 산물이었다. 이에 반해 제품은 레디메이드가 아닌 별도로 제작된 물건이다. 김병호의 작품, 아니 제품들은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상품들처럼 매우 정밀하다. 그는 이러한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서 매우 치밀한 설계도면을 제작한다.

이러한 도면이 없이 제품의 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Silent Pollen'(2009)은 그가 직접 설계하여 주문 제작한 나팔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각각의 관에서는 미세한 소리들이 나는데 이 소리들 역시 그가 직접 설계하여 제작한 회로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록 김병호의 작품 자체가 미디어 아트라는 범주에 분명하게 속한다고 하기에는 모호한 측면도 존재하지만, 그의 작업은 미디어 아트의 특성을 매우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미디어 아트는 매우 치밀하게 제작된 예술이라는 점, 그리고 제품과 흡사하면서도 결코 그 자체가 일반적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상품은 아니라는 점이 그것이다.

미디어 아트는 그 특성상 제품과 구분되지 않지만, 결코 상품 자체는 아니다. 그 자체가 상품일 경우 미디어 아트라는 수식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는 상품이라는 배설물과 또 다른 배설물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