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진행렬 <영웅> 비롯 <아, 나의조국>, <화려한 휴가>, <서편제>등 무대에

여성악극 '아, 나의 조국'
'역사뮤지컬=조선시대 이야기'? 지나치게 압축시킨 도식 같지만 그동안의 전례를 돌아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역사뮤지컬 하면 떠오르는 <명성황후>, <대장금>, <남한산성>, <선덕여왕> 등 그동안 역사뮤지컬은 주로 조선시대를 다룬 작품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최근 몇몇 시도들이 이런 고정관념을 서서히 깨고 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색다른 조명으로 지난해 매진 행렬을 일으킨 <영웅>을 비롯해 5월부터 차례로 무대에 오르는 <아, 나의 조국>, <화려한 휴가>, <서편제> 같은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이 역사뮤지컬의 대열에 새롭게 합류하고 있는 것. 기존의 역사뮤지컬과 다른 영역과 형식으로 새로운 역사뮤지컬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작품들을 조명해본다.

6.25부터 5.18까지 현대사를 훑는다

한국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령 민감한 영역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그 진위 여부를 떠나 반사적으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 것은 북한이다. 이는 '6.25'라는 민족상잔의 후유증이 아직까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2일 의정부 예술의 전당 소극장에 오른 여성악극 <아, 나의 조국> 역시 그런 후유증과 고통에 관한 회고라고 할 수 있다. 6·25 전쟁 때 북한의 포로가 됐다가 43년 만에 탈북한 조창호 중위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표현했던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굴곡있는 현대사의 단면을 한 인물을 통해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뮤지컬 '서편제' 제작진. (위·좌부터) 시계방향-윤일상 이자람 공동 음악감독, 조광화 극본 및 작사, 이지나 연출
이 작품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반성'이다. 이 작품으로 연출가 데뷔를 한 소설가 복거일은 제목인 '아, 나의 조국'에 영웅을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국군 포로 문제를 외면한 데 대한 반성의 뜻을 담았다. 그는 조창호 중위의 장례를 재향군인회가 주관하는 '향군장'으로 치른 것에서는 울분과 분노마저 느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 작품을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그런 현실에 대한 반성을 담아낸 일종의 예술적 앙가주망(현실 참여)"이라고 표현한다.

이번 작품의 콘셉트는 예상 주 관객층인 6.25 전쟁 세대에 맞춰져 있다. 악극의 형식을 선택한 것이나 '전우여 잘있거라', '비내리는 고모령', '삼팔선의 봄', '굳세어라 금순아' 등 당시 유행하던 15곡의 대중가요들은 관객들이 얼마 전 지나온 현대의 향수를 되새기게 한다.

한편 광주의 빛고을시민문화회관에서는 30년 전의 참사를 재구성한 작품을 무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김지훈 감독의 영화 <화려한 휴가>가 15일부터 뮤지컬로 재탄생되는 것.

130억 원 가량의 제작비를 들여 80년대 광주를 그대로 재현한 세트와 '그 사건'의 재조명은 800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은 바 있다. 흥행 성공과 함께 뮤지컬화의 논의도 가속화됐다. 이후 3년여의 시간 동안 5.18 30주년 기념 뮤지컬 제작을 목표로 공연계의 대표적인 크리에이티브팀들이 꾸준한 논의를 거쳐 뮤지컬 <화려한 휴가>를 무대에 올리게 됐다.

지난 1월 광주에서 치러진 쇼케이스에서 뮤지컬 버전은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암울했던 과거 사건의 표현 대신 두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미래를 희망적으로 부각됐다. 10일간의 당시 기록들은 선동적이거나 호전적인 어조 대신 토속적인 음악과 안무로 아름답게 표현됐다.

뮤지컬 '화려한 휴가'
특히 이런 변화들이 두드러진 부분은 음악에서다. 영화 <청연>과 <인디안 썸머>로 대종상 음악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미하엘 슈타우다허 경희대 포스터모던음악과 교수가 작곡한 창작곡들은 현대사의 비극과 희망을 극적으로 승화시킨다. 남녀 주인공이 함께 부르는 '다시 부르는 사랑'을 비롯해 전체 합창곡인 '하늘 소풍'과 '광주 내 사랑' 등은 비극적인 정서 대신 서정적인 분위기를 더해 순수하고 희망적인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6월부터는 서울로 올라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가는 이 작품은 5.18 30주년을 맞아 그날의 이야기를 '화해와 해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 쓰기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다시 보는 민족사, <서편제>와 <영웅>

하반기에는 뮤지컬로 올려지는 영화 한 편이 더 있다. 1993년 개봉됐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18년 만에 대작 뮤지컬로 재탄생하는 것.

영화 <서편제>는 고 이청준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등 주요 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한 국내 최초의 '1백만 영화'. 1960년대 가족사와 소리꾼의 여정을 통해 한국의 한과 정서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선보이는 뮤지컬 <서편제>는 원작 소설과 영화의 모티프를 재해석해 현대의 트렌드와 무대예술에 맞게 새롭게 선보이게 된다.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새로운 스토리텔링. 국악을 상징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현대음악에 젖어있는 아들이 갈등하지만 이내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동화된다는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공동 제작사인 (주)청심 관계자는 "소설과 영화 <서편제>가 한국인의 한과 정서를 표현했다면, 뮤지컬 <서편제>는 한국인의 끼와 신명을 현대적으로 그려나가는 데 중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지난해 말부터 역사적 인물과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형식의 시도로 평단과 관객의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영웅>이 올해 말 다시 공연될 것으로 알려져 팬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리고 있다.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로 예정된 공연 일정을 앞두고 지난 4월 오디션이 치러져 9월부터는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하게 된다.

왜 역사극은 늘 고대와 중세에만 머물러 있을까. 이 질문은 TV 드라마에서도 늘 존재해오던 것이었다. 사극을 기피하는 관객들은 '역사'뮤지컬이라는 장르만으로도 고개를 흔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백 년도 채 안 된 역사들은 실감 못하는 판타지가 아니다. 먼 조상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부모 혹은 나의 이야기. 관객들이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뮤지컬에서 더 큰 공감과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