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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작가가 바라보는 시대의 자화상

<인인인 시리즈>통해 <코뿔소의 사랑>, <잠 못드는 밤은 없다>, <인어도시> 차례로 공연
  • 연극 '코뿔소의 사랑'
동물원의 코뿔소 사육사인 마루는 단 한 번도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고지식한 남자다.

'다다익선'이라는 자본주의 논리에서 보면 마루는 오히려 어리석은지도 모르겠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던 그가 처음 밍밍을 보던 순간, 그녀는 숨을 삼키며 흐느끼고 있었다.

향긋한 샴푸 냄새와 복사기 냄새가 교차하는 그녀는 '아마도' 회색 빌딩 숲에서 일하는 사무직 여성일 거라고, 마루는 추측한다. 하지만 동물의 분비물 냄새가 나는 남자와 세련된 직장여성의 관계는 엇갈릴 뿐이다. 마루의 격하고도 눈먼 구애와 밍밍의 위태롭고 변덕스러운 태도 속에서 그들의 만남은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1978년 개혁개방화 정책 이후 중국에서 개인이 변화된 환경의 속도감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달콤한 자극에 따라 젊은 세대의 삶의 방식이 혼란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재편되었던 시대. 극 속 인물들은 이 시대의 중국 젊은이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중국의 여류작가 랴오이메이가 마루와 밍밍의 '소통할 수 없는' 사랑을 빌어, 중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를 건드렸던 1999년. <코뿔소의 사랑> 초연 당시, 그간 숨죽였던 젊음은 자신들을 대변하는 연극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11년에 된 지금까지도 전석 매진행렬을 하며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진 연극은 현대 중국 연극의 패러다임까지 변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연극 '잠 못드는 밤은 없다'
<코뿔소의 사랑>은 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인인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됐다. 자국민을 한국, 중국, 일본의 작가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연극 시리즈는, 중국-일본-한국의 순서로 7월까지 공연된다. <코뿔소의 사랑>(박정희 연출가)은 이 시리즈의 '중국인' 편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서 진정성보다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고, 요령이다, 라고 부유하는 인간들은 말한다. "진심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심이라고 믿는 것'"이라는 연애교수의 말은 마루의 눈먼 사랑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그들이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은, 점점 더 고독해진다는 것뿐이다. 마루도, 밍밍도, 부유하는 인간들도.

작가 랴오이메이가 바라본 현재를 사는 중국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몸집이 크고 공격적인 코뿔소는 사실 시력이 좋지 않다고 한다. 세상의 변화에 둔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고독하고 소통할 수 없는 존재'가 코뿔소라고 작가는 말한다. 계산이 빠르고 명민해진 현대의 중국 젊은이들과는 상반된, 밍밍을 향한 마루의 사랑과도 같은 코뿔소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다.

은퇴이민자들이 세운 小 일본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한국인

일본인의 고독감은 중국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 역동적으로 끓어오르고 방황하는 청년의 이미지를 가진다면, 일본에선 고립된 노인의 이미지를 풍긴다. 과거 10명의 노동자가 한 명의 노인을 부양했다면 이젠 2-3명의 젊은이가 1명의 노인을 책임져야 하는 세상이다.

그만큼 고령화된 사회고, 또 그만큼 활기를 잃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고령의 은퇴자던, 젊은이던 간에 적지 않은 이들이 일본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코뿔소의 사랑>에 이어 5월 11일부터 공연되는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박근형 연출가)는 그 같은 일본의 현실이 담겨 있다. 극히 절제된 대사로 '조용한 연극'으로 유명한 히라타 오리자의 2008년 작품이다.

말레이시아 어느 리조트에 모여 살고 있는, 일본의 중장년 은퇴이민자들이 극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산책과 골프, 테니스 등을 하면서 편안하면서도 권태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일본에서 지급하는 연금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살아가지만, 몸에 밴 문화마저 벗어버리진 못했다. 일본의 음식을 먹고 DVD를 보면서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들.

'누가, 무엇이, 그들을 일본에서 살 수 없게 하는가.' 히라타 오리자는 작품을 통해 묻고 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족의 신용카드로 인터넷 쇼핑을 하던 히키코모리가 가족을 죽이는 사건이었는데요. 부모가 인터넷을 끊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당시 결혼한 남동생도 실직해 부모 집에 와 있었다고 합니다. 히키코모리에 고용문제까지도 가지고 있는 이 사건은 일본 사회의 현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작가는 이 사건이 작품 구상과는 관계가 없지만 '일본이 그 누구에게도 생활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물음의 연장선에 있다. 한때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이 쇠락하는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그리는 것이 작가로서의 임무라고, 히라타 오리자는 말한다.

<인인인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한국인을 바라본 고선웅 작가·연출가의 <인어도시>다. 이번 시리즈를 위해 기획된 작품이어서 지금도 작품을 완성해가는 중이다. 한 편의 연극으로 어떻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고선웅 작가를 무척이나 괴롭힌 듯했다. 작가는 잠재되어 있는 한국인의 면면을 찾기 위해 역사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철학자 탁석산 선생의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책도 많은 도움이 됐다.

거름망에 걸려지고 남은 한국은 '복잡하고 비논리적인 나라, 조울증 환자와 같은 나라'의 모습이었다. '내가 날 지키지 않으면 밀려날 것이다'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다' '강해져라. 약하다면 순응해라' 등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열등감의 표현들은 한국인의 의식을 관통하는 '피해의식'의 다른 말이라고, 작가는 판단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이미지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선웅 작가가 의문을 품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래서 다시 돌아간 곳이 사소한 일상이다. 물론 연극적 상상력과 판타지는 가미됐다. 병실 창가 쪽 저수지에 살고 있는 인어가 죽음 직전의 환자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면서 달라지는 환자들의 모습. 노인문제, 빈부격차, 자살 등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회 문제들이 평범한 인간의 죽음을 둘러싸고 보여진다.

<코뿔소의 사랑>의 연출을 맡은 박정희 연출가의 말대로 "현대에서는 개인의 삶이 그 사회의 성격을 상징"한다. 한 편의 연극이 한 나라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삼국의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 시대의 자화상과 마주하게 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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