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조 '담배 피우는 사연' 전정·관·문화계등 30여 명 흡연장면 통해 시대 속 사람모습 비춰

천경자 화가. 1983. 11. 6. 압구정동 자택
"건강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려야 할텐데 예술가로서 어느 날 한계를 느껴 자살한 가와바다 야스나리와 미시마 유끼오는 그런 의미에서 이해가 간다. 소설가는 쓰고 화가는 그려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1983년 11월 6일 화가 천경자는 서울 압구정동 집에서 그림을 그리다 잘 안 되면 붓을 놓고 멍하니 담배를 피웠다.

1982년 9월 23일 서울 명동성당 추기경실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건강에 나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통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로 추기경은 "지금의 사회는 인권을 옹호할 공권력에 의해 오히려 유린되고 있다"고 말했다.

가요계 최초로 오빠 부대를 이끌고 다닌 가수 조용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꽁초가 되도록 뻐끔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1988년 8월 11일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이혼 발표를 한 조용필이 들의 질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과 다름없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는 <전민조-'담배 피우는 사연'전>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연들이다. 금수현(음악가), 김대중(대통령), 김수환(추기경), 천경자(화가), 서정주(시인), 유진오(정치인), 김준엽(학자), 조용필(가수), 신성일(배우), 김수현(드라마작가), 박철순(야구선수) 등 작가가 사진 시절 인터뷰한 인사들 중 30여 명의 담배 연기 속 사연을 담았다.

영화배우 신성일. 1973. 8. 24 안국동
이 전시는 흡연 장면을 통해 시대 속의 사람 모습을 비춘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인 전민조는 언론인 출신답게 정·관·문화계의 유명 인사뿐만 아니라 주식에 실패한 친구, 범죄인, 시위학생, 길에서 만난 무명씨 노인 등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담배를 쥐고 있는 사람의 손과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표정은 참으로 다양하다. 천경자 화가에게선 담배가 꼭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당당하면서 여유로워 보인다. 정권에 밉보여 기업이 공중분해된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의 담배 피우는 표정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울분을 토하는 감정들이 실감난다.

삼성 이병철 창업주의 장남으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이맹희씨가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날리는 모습은 재벌가의 그림자와 고뇌를 보여주는 듯하다. 1974년 당시 방송작가로 떠오르던 김수현씨가 담배 피우는 모습에 대해 작가는 "남성들 앞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거침없이 담배를 피우는 여성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밖에 시대와 개인의 양면을 보여주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손에 쥔 담배, 애연가인 서정주 시인과 소설가 최일남이 맛깔스럽게 피우는 담배, 선수생활보다 인간관계가 더 힘들어 보이는 야구선수 박철순의 담배 피우는 얼굴, 판문점 북한 노동신문 의 거친 끽연, 체포된 살인자가 인생을 마감하는 듯 후회와 절망으로 피우는 담배연기 등 담배의 아우라는 넓고 깊다.

이렇게 담배 피우는 순간을 잡아내 세상사를 말하는 작가는 정작 흡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란스러운 시대에 연기를 허공으로 날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하지만 담배가 결코 현실을 극복하는 수단은 아니다."

서정주 시인. 1985. 8. 30. 남현동 자택
'담배 피우는 사연'전은 기억에는 사라진 줄 알고 있었던 지나간 우리 삶의 한 순간이 온전하게 남아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한 시대를 상기시킨다. 이 특별한 사진전은 6월 1일까지 이어진다. 02) 734~7555


김수현 방송작가. 1974. 1. 7. 수유리 자택
가수 조용필. 1988. 8. 11. 조선호텔
김수환 추기경. 1982. 9. 23. 명동성당 추기경실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1987. 11. 9. 부산 자택
살인범. 1978. 11. 27. 종로서
이맹희씨. 1988. 12. 13. 장충동
발천순 야구선수. 1994. 6. 10. 잠실야구장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