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로베르트 라차리니의 <해골> 죽음의 상징보다 익숙한 공간체계로부터의 일탈 이끄는 장치

한스 홀바인, '대사들'
로마시대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인 죽음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죽음이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자다운 발상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말장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에픽테토스의 말을 뒤집는다. 죽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비록 육체적인 죽음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음은 우리에게 가끔씩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누구나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에 불현듯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삶의 환희를 느끼는 그 순간 불쑥 모든 것들의 덧없음과 인간 존재의 유한함에서 비롯된 무상함이 불청객처럼 행복의 잔치를 망가트린다.

로베르트 라차리니, '해골'
죽음이 우리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는 명제는 억지로 우리에게 상기시키지 않아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아무리 환희와 아름다움, 가치 있는 것들로 채워도 소용이 없다. 죽음은 삶이 안락하고 희망차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슬며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우리의 눈이 잠시 방심하거나 시야가 틀어지는 순간 그 정체가 우리에게 드러난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대사들>(1533)은 바로 '메멘토 모리'를 극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제목대로 화면은 프랑스에서 영국에 파견된 대사 텡드빌과 주교인 드 셀브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삶에 대한 한 치의 회의도 없어 보이는 두 인물과 함께 탁자에는 지구의, 나침반, 해시계, 책 등과 같은 당대 과학적 발명과 진보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삶은 환희와 진보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화면을 잘 들여다보면 이러한 것들과 어울리지 않게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타원형의 형상이 바닥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얼핏 정면으로 보면 이 형상의 실체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의 중앙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이동한 후 비스듬한 각도에서 바라보면 그 타원형의 형상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해골의 형상인 것이다.

이 그림은 라캉의 텍스트에서 언급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라캉은 이 그림을 '응시'(regard)의 구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한다. 응시란 우리의 일상적인 시선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든지 뛰쳐나올 준비를 한 채 항상 은폐된 모습으로 매복을 하고 있는 눈초리이다. 홀바인의 그림에서 대사들과 일상적 사물들을 보기 위해 화면을 정면으로 볼 경우에는 왜곡된 형상(왜상, anamorphosis)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적인 시선에서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은폐되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현듯 나타나는 죽음처럼 일상적인 시선에서 벗어날 때 그 왜상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를 기분 나쁘게 응시한다. 마치 나와 상관 없는 손님처럼 나타나는 죽음이 다른 누구의 죽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죽음이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 기분 나쁜 응시 또한 알고 보면 내 자신의 응시인 것이다.

2000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비트스트림>(Bitstreams)라는 전시에 선 보인 로베르트 라차리니(Robert Lazzarini)의 설치작 <해골>(Skulls)의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대부분 홀바인의 '대사들'을 떠올릴 것이다. 환한 조명이 켜진 작은 전시장을 들어서면 네 개의 벽면에 각기 다른 지점에서 바라 본 해골이 하나씩 성인의 눈높이에 맞춰 걸려 있다.

네 개의 벽면에 걸린 네 개의 해골은 벽으로부터 몇 센티미터 떨어져 걸려 있으며, 마치 홀바인의 그림에서처럼 왜곡된 형상을 하고 있다. 각각의 해골은 제각기 다른 각도에서 본 것처럼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어 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어느 한 벽면에 걸린 해골을 자세히 관찰하려는 순간, 그는 해골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는 천장과 바닥에서 투사되는 조명에 의한 빛과 그림자의 효과 때문인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애초에 해골 자체가 뒤틀린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뒤틀린 형태는 우리 몸에 깊숙이 자리잡은 원근법적 공간 체계와는 전혀 맞지 않으며, 공간 자체가 왜곡된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다른 벽면에 있는 해골을 보기 위해서 몸을 돌리거나 이동하며, 해골들 간에 어떤 공간적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라차리니의 <해골>은 여러모로 홀바인의 '왜상'이 주는 교훈, 즉 '메멘토 모리'를 떠올리게 한다. 내용에서 해골이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바도 그러하거니와, 해골이 적나라한 모습이 아닌 왜곡되고 변형된 형상, 즉 왜상을 띠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라차리니의 작품이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단지 '메멘토 모리'의 교훈을 효과적으로 부각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라차리니의 해골과 홀바인의 해골이 전혀 다른 왜상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데서 발견된다. 홀바인의 그림에서 왜곡된 상은 몸을 오른 쪽으로 이동시켜서 비스듬하게 보면 정상적인 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차리니의 왜상은 어떠한 시점에서 보더라도 정상적인 이미지로 복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라차리니의 해골은 '왜상'이 결코 아니다. 해골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상이다. 말하자면 어떤 것, 혹은 정상적인 이미지로부터 왜곡된 이미지가 결코 아니다.

이는 라차리니의 매우 독특한 작업과정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실제 해골을 디지털 이미지로 레이저 스캐닝한다. 그런 후 이 이미지를 정보데이터화한 후 2차원적인 평면에서 뒤틀고 왜곡시킨다. 이렇게 뒤틀리고 왜곡된 2차원적인 이미지는 다시 3차원적인 조각물로 주조된다. 레진을 재료로 사용한 그의 조각 작품은 3차원적인 조형물인 동시에, 2차원적인 평면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이미지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형은 디지털 작업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관객에게 새로운 공간 경험을 부여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의 일부이다. 관객이 전시 공간에서 경험하는 것은 해골 혹은 죽음의 불길한 예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익숙한 공간적 체계나 좌표로부터 일탈되는 것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이다. 해골은 죽음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익숙한 공간적 체계로부터 일탈의 과정을 극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장치이다. 그것은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에서 섬뜻한 아프리카의 조각의 얼굴을 차용하여 그려 넣은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준다.

이렇게 일상적인 공간의 좌표로부터 어긋남으로써 관객은 현실적 공간 자체를 상실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몸에서의 거부반응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거부반응은 곧 소멸하게 되는데 이러한 거부반응의 소멸은 이 공간을 우리의 시각에 맞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몸이 이 공간체계에 맞추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낯선 것에 대한 거부반응은 낯선 것에 대한 향유로 바뀐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왜곡된 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에 우리에게 그것은 왜곡된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왜곡된 이미지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결코 현실적인 시각이 아니다. 그러한 시각은 디지털 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각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는 우리에게 하나의 왜곡된 이미지로서 영원히 낯설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눈은 사물의 이미지를 쉽게 변형시키지 못하지만, 디지털에 의해서 자유롭게 변형된 이미지나 공간에 대해서도 적응을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