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14) 영화 <대부 3> 속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음악 배경으로 마피아 대부의 인생 요약

<대부 3>은 마피아 세계의 흥망성쇠를 통해 삶의 의미를 추구한 대서사시 <대부> 시리즈의 완결판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피아의 대부로 일생을 살아온 마이클.

하지만 그의 아들 안소니는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엉뚱하게 오페라 가수가 되어, 아버지의 고향 시칠리아 섬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된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는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안소니는 여기서 주인공 투리두 역을 맡았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공간적 배경은 시칠리아 섬, 시간적 배경은 부활절 날이다. 투리두는 약혼녀 산투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유부녀가 되어 있는 롤라와 몰래 만난다.

산투차는 자기를 버리고 옛 애인과 몰래 만나는 투리두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하지만 투리두는 그녀의 간청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산투차는 롤라의 남편 알피오를 찾아가 투리두와 롤라의 관계를 폭로하고, 그 일로 투리두와 알피오는 결투를 벌인다.

이 결투에서 투리두는 알피오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한다. 애인의 죽음을 보고 놀란 산투차. 산투차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마을 사람들에게 "투리두가 죽었어요."라고 외치는 가운데, 오페라는 오케스트라의 비장한 울림과 함께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대부 3>은 후반부의 상당 부분을 오페라 공연 장면에 할애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오페라의 공연 장면과, 극장의 안과 밖 그리고 저 멀리 바티칸에서 벌어지는 마피아들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를 오페라 장면과 교차시켜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만약 이 장면에 오페라가 없었다면, 틈틈이 자행되는 살육의 극적 효과가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오페라가 진행되는 동안 마이클 집안의 암살자들은 적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지만, 적들도 역시 암살자를 보내 마이클을 노린다. 극장으로 잠입한 암살자가 마이클이 앉아있는 로열석을 향해 총을 겨누는 순간 오페라의 오케스트라가 음산한 음악을 연주한다.

그 밖에 오페라에 나오는 부활절 행렬과 합창을 교황이 살해당하는 장면과 연결시킨 것이라든가, 투리두가 죽은 후 비장하게 울리는 오케스트라 소리를 배경으로 목이 매달린 채 살해당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오페라의 여러 장면을 영화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절절하게 사용한 감각이 놀랍다.

오페라가 끝나고 마이클은 아내, 딸과 함께 공연장을 나오면서 말한다. "이제 우리 꼴리오네 집안이 예술가 집안이 되었구나"라고. 그동안 총질이나 해대던 마피아 집안에서 예술가가 나왔다는 것이 자못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안소니의 존재는 피로 얼룩진 마피아 집안의 이미지를 윤색해주는 허울 좋은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아들이 예술가가 됨으로써 그 동안 그가 해댔던 총질에 면죄부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것이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그다음 장면에서 밝혀진다.

마이클이 가족들과 함께 극장의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신부 복장을 한 암살자가 마이클에게 총을 쏜다. 그러나 총탄에 쓰러진 사람은 마이클이 아닌 그의 딸 메리. 그것을 보고 마이클과 그의 아내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마이클은 가족을 위해서 마피아를 접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끝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다가 결국 딸 메리까지 잃게 되었다. 평소에 딸을 껴안으며 "널 위해서라면 지옥불에도 들어갈 수 있단다""라고 말할 정도로 딸을 사랑했던 마이클. 고향 시칠리아의 오페라 극장 계단에서, 그는 총탄에 쓰러진 딸을 부둥켜안고 처절하게 오열한다.

그 오열을 배경으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에 나오는 <간주곡>이 흐른다. 음악은 젊은 시절의 회상 장면에 이어 마이클이 고향 시칠리아 섬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까지 계속된다. 영화는 불과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간주곡을 배경으로 마이클의 삶을 요약한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우주를 지배하는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그저 간주곡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간주곡이 끝날 무렵, 마이클은 숨을 거둔다. 마피아로서 살았던 그 숱한 영욕의 시간들을 뒤로 한 채.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