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주 개인전>5년 만의 선화랑 전시… 시계·말 대신 낡은 책·명화에 시간 담아

벽돌, 의자, 시계, 말, 오랜된 명화와 낡은 책 주변에서 흔히 접하거나 자주 봐온 그래서 익숙한 화면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한 발 떨어져 다시 보면 하늘과 대지, 꽃, 구름과 병치된 화면은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은. 그러면서 알 수 없는 공허함, 진중함, 회한 등이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림을 주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서양화가 이석주(58·숙명여대 미대 교수)의 작품은 그렇게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상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의 인생(삶)은 어떠한지, 그리고 자신의 실재를 인식하고 있는가 하고.

이석주는 '익숙함'과 '낯섬'의 대비적 요소들을 변주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을 통해 세상과 대화한다. 이 대화는 처음 삭막하고 어색해 꺼리게 되지만 그 안에서 자아를 찾게 되면 세상을 관조하고 자연과 사회에 융합되는 기쁨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이석주의 작품이 5년 만에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선보인다. 극사실주의적 화면 구성과 강렬한 인상은 여전한데 작품의 오브제(대상물)가 이전과 크게 다르다. '이석주 그림' 하면 떠오르는 '말과 시계, 기차' 는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대신 낡은 책과 명화 속 인물, 손때 묻은 종이, 양귀비꽃으로 바뀌었다.

이석주 작가
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주목하고 관조하게 됐다고 말한다. "젊을 때는 그로테스크하고 고뇌에 찬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삶의 유한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더군요. 예전에는 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정말 아름답고, 풀을 봐도 새롭고 하늘도 더 푸르게 느껴집니다."

그의 작품 속 오브제의 변화는 단순히 '나이듦'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세월의 흐름에서 건져낸 '시간의 무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창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변화, 그런 중에도 변하지 않은 '시간의 속성'을 천착한 일관된 주제의식 말이다.

국내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 대표작가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그는 초기인 80년대 '벽돌' 시리즈의 중성적이고 차가운 리얼리즘으로 일상의 삭막한 도시와 파편화된 삶을 조망하였다. 90년대 들어서는 이석주 특유의 서정성과 한국적 정서의 회화로 변신, 자연적이고 여유가 곁들인 그만의 언어를 선보였다. 멀리 보이는 들판, 숲, 산 등의 목가적 대상을 배경으로 질주하는 증기기관차, 말, 시계, 천에 덮인 의자 등의 이미지들이 대조를 이루며 메마른 도시적 시간 개념과 공간의 일루전이 극적인 완결성을 더했다.

그러나 목가적인 자연과 대비되는 기차와 말, 바늘이 멈춘 시계는 질주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유한한 삶을 이어가는 현대인의 고독하고 우울한 자화상을 일깨운다.

이석주의 이번 전시는 그래도 세상과 삶은 아름다운 구석이 많다는 것을 한결 너그럽게 보여준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와 같은 명화, 낡고 구겨진 책, 빛 바랜 영화 포스터, 금방이라도 시들 것 같은 꽃이 전하는 메타포들이다. 이는 유한성과 무한성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대조와 융합을 이루는 초현실주의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더욱 선명하고 깊숙이 다가온다.

그에 따르면 작품 속 명화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시간을 지배하는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꽃은 언젠가 시들게 마련인데 우리 인생과 닮았다. 유한하기에 더 아름답고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렇듯 명화와 책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리게 하며 기억의 앙금을 다독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지탱하는 시간이 '기억'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이는 이석주의 작품을 관통하는 '시간성'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그의 미학적 미덕과 닿아 있다.

작가는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유의 공간>을 화두로 삼아온 이석주의 이번 전시는 일상에 쫓겨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에게 관조와 내면세계로의 탐험을 제공할 것이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이어진다. 02)734-0458


'사유적 공간' 2009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