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파울 클레의 회화, 카이페스의 '목격' 등 가독성과 조형성 상관관계 실험

카이페스, '목격'
바우하우스의 교장이었던 그로피우스는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서체 또한 그 자체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였다. 흘림체인가 정자체인가 혹은 고딕체인가의 여부가 글의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통념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글의 서체, 즉 타이포그래피가 글을 읽는 사람에게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로피우스는 산세리프라고 부르는 기하학적 형태의 고딕체를 가장 이상적인 타이포그래피로 보았다.

기하학적인 이 서체는 과학적 진보와 디자인의 표준화라는 그들의 모던한 이상에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예술가들에게 비친 산세리프의 가장 큰 미덕은 장식을 배제한 반듯한 형태가 분명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글의 기능에 가장 잘 부합한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가독성(readablity)이라는 글의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조형적인 형태가 기하학적인 타이포그래피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산세리프 타이포그래피의 조형성(plasticity)은 가독성과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예술이론가인 리오타르는 가독성과 조형성이 전적으로 불일치하거나 반비례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가령 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을 읽고자 할 때 우리는 결코 글의 조형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쓰인 '물'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그것을 동일한 의미로 환원한다.

파울 클레, '동물들의 만남'
어떻게 쓰던 '물'이라는 기호를 분명하게 나타내기만 하면 된다. 글의 조형성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얼마만큼 분명하게 쓰는가가 관건일 뿐이다. 글의 조형성은 오히려 그것을 의미를 담긴 기호로 보지 않을 때 드러난다. 글자를 텍스트를 이루는 기호로 읽어내려 할 경우 활자의 조형적 특징들은 사라지고 만다.

회화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미술사를 보면 회화는 가독성보다는 조형성이 우선일 것이라는 사람들의 통념이 배반당한다. 중세의 회화를 보자. 그림이 조형적 이미지로 채워져 있기보다는 그림 속의 이미지는 글자와 생김새만 다른 또 다른 기호일 뿐이다. 머리가 길고 말랐지만 광채가 나는 인물은 예수이며, 배가 부른 청순한 여인은 성모 마리아이다. 마리아 옆에 있는 백합은 그녀가 동정녀임을 상징하는 순결의 기호이다.

모든 이미지들은 성경이라는 텍스트의 일부를 이루는 기호들이며,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이 그림들을 읽어낼 수가 없다. 그림은 조형적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닌 읽기 위한 것이었다. 그림 속에 있는 많은 이미지를 표현하는 선들은 조형적인 선이 아닌 글자를 형성하는 선처럼 가독성을 위한 선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출신의 독일 화가인 파울 클레(Paul Klee)는 회화에서 선이 글자처럼 가독성의 지배에 놓이게 되는 것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마치 취학이전의 어린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린다. 이러한 서툰 선의 사용은 클레의 서툰 솜씨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서툴게 보이는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였다. 서툴게 그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치 완벽한 데생의 경우처럼 선을 세련되게 잘 그릴 경우 그 선의 조형성은 소멸된다. 가령 사람을 그릴 경우 실물과 거의 흡사하게 그려진 사람의 이미지에서 선은 조형성을 상실하고 사람을 지시하는 기호 혹은 글자가 된다. 비뚤어진 선을 볼 때 사람들은 그 선을 단지 얼굴의 윤곽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이 얼굴이라는 기호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선의 조형성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산세리프 글자체
카이페스(Arijana Kajfes)의 연작 '목격'(Occular Witness)은 빛과 시각에 관한 프로젝트이다. 관객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마스크를 착용하게 되는데, 이 마스크를 착용하면 외부와는 시각적으로 단절되며 오로지 착용한 마스크 내부에서 형성되는 이미지들만을 볼 수가 있다. 마스크 외에도 마스크와 연결된 센서를 손가락에 부착하게 되는데 손가락의 움직임을 센서가 파악하여 마스크 내부의 색을 다채롭게 변환시킨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가장 기본적인 시각적 정보 단위인 빛을 중의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빛은 우리의 시각적 정보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일 뿐만 아니라 색의 기초이기도 하다. 시각적 정보 혹은 의미는 모두 빛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우리가 형태를 시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반사된 빛을 통해서이다. 색 또한 빛을 형성하는 다양한 파장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작품에서 빛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시각적 정보 혹은 기호 이전의 상태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관객은 빛이 색과 형태와 같은 시각적 정보로 형성되는 것을 보지만, 그 색과 형태는 어떠한 인지대상도 아니다. 말하자면 빛이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이 보는 것은 빛을 통해서 인지대상이나 언어기호 이전의 이미지들을 경험할 뿐이다.

빛은 형태와 색이라는 정보를 만들어내지만 그 정보들은 시각적 정보일 뿐 결코 가독적인 글자가 아니다. 손가락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서 실리콘 헬멧을 착용한 관객은 임의로 색상을 변경할 수 있다. 이른바 관객이 경험하는 이미지가 관객의 행동이나 반응에 의해서 변화하는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목표가 환경 또는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구현하는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관객 혹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수단이 빛이라는 점에서 빛은 시각적 정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보는 가독성을 전제한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이 정보는 읽을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조형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조형적 이미지 그 자체가 소통을 위한 정보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