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 (16) <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 속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생일 선물로 고른 브람스 음반 통해 평범한 여자들과 다른 면모 보여줘
이런 여자는 세상 모든 가정주부들의 공동의 적이다. 한때는 버들가지같이 나긋나긋한 허리를 자랑했으나 이제는 벨트를 하지 않으면 허리가 어디에 붙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중년의 몸매.
이런 몸매를 가진 세상의 아내들은 밖에서 치명적인 매력으로 자신의 남편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여성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맨키비츠 감독의 <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운명에 놓은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여자가 나온다. 시골에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늘 소외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데보라, 겉으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듯 보이지만 부부간에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는 리타,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돈 자랑을 하는 것으로 삶의 위안을 삼는 로라 메이.
그런데 이 세 사람에는 공동의 적이 있다. 바로 애디 로스라고 하는 여자이다. 애디 로스는 세 여자의 남편들과 모두 친구 사이다. 남편들은 자기 부인들에게 모두 이구동성으로 애디가 매우 우아하고 교양이 있으며, 지적인 여자라고 말하고, 그 말을 듣는 아내들은 그녀에게서 묘한 질투심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는 애디라는 여인의 모습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애디의 존재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세 여자의 회상 속에서 애디 로스는 정말 멋진 여자다. 리타의 남편 핍스의 생일날 애디는 생일선물로 음반을 보낸다. "음악이 사랑의 음식이라면 틀어봐"라는 멋있는 메시지와 함께. 이 음반에는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실려 있다. 리타의 남편은 자기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애디에게 한 지가 일 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이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놀라워한다. 이런 애디의 수준 높은 배려에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와이프 리타는 묘한 열등감을 느낀다.
여기서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애디가 고른 음악이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클래식에 내공이 쌓인 사람이 아니면 좋아하기 힘든 음악이기 때문이다. 만약 애디가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나 <합창교향곡>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같이 널리 알려진 곡을 골랐다면 어땠을까.
보통 사람이 가지지 못한 문화적 교양의 상징으로서 애디의 존재가 그렇게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고른 것 같다. 적어도 이 곡을 좋아한다는 것은 클래식 음악에 대해 상당한 안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문화적 소양, 음악적 안목의 표상이다. 이 곡은 브람스가 48살 때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감동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인데, 비록 협주곡이지만 거대한 교향곡에 피아노 파트가 첨가된 듯 웅대하면서도 심오한 기상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여성 취향의 음악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곡에서는 세상 모든 여자들의 귀를 간질이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멜로디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디 로스가 이 곡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녀가 보통 여자들과는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다. 아마도 그녀는 진지하고 씩씩하며 선이 굵은 남성적인 취향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세 여자의 남편들과 골고루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