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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 드러내는 맛

[Story in the Kitchen] (3) 문학 속 라면은 어떤 맛?
영양의 보고, 구휼의 상징… 현대문명의 아이콘으로 묘사
지난주 휴가차 일본에서 라멘을 사먹었다. 한국에서도 자주 먹는 라면이지만, 그래도 본토에 왔으니 맛을 볼 겸 밤 아홉시가 훌쩍 넘어 라멘집에 들어갔다.

라멘을 먹으며 라면을 생각한다. 그 둘의 관계는 환경에 따라 귤이 되기도 하고, 탱자가 되기도 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란 말을 연상케 한다.

무엇이 바다를 건너온 라면을 한국적인 음식으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 규격화한 공산품에 목 매게 하는 걸까?

라면에 대한 단상

'국수를 증숙시킨 후 기름에 튀겨서 만든 유탕면에 분말 수프를 별첨한 인스턴트식품.'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온 라면에 대한 정의다. 밀가루와 기름, 수프의 조합인 이 식품은 현대 한국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라멘의 국물 맛이 동물의 뼈와 살이 만드는 끈적한 감칠 맛이라면, 한국 라면의 국물 맛은 수프 가루의 화학작용이 빚어내는 인위적인 감칠 맛이다. 라면 수프가 만들어내는 국물은 규격화한 공산품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며, 그것이 빚어내는 특유의 감칠 맛은 다분히 한국적이다.

김치가 중세를 건너 근대와 현대를 관통한 한국의 맛이라면, 라면은 이전과 단절된 현재, 에피스테메적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맛이다. 라면, 정확하게 인스턴트 라면이 이룩한 것은 미국의 햄버거와 또 다른 우리식의 현대다.

백과사전에서는 라면의 특징으로 '건조식품'을 들고 있다. '수분이 많은 식품에 비해 단위 중량당 영양분이 많으며, 튀긴 식품이므로 지방이 많아 120g당 500kcal의 열량을 내는 고(高)칼로리 식품이다.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생산하며 제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네이버 백과사전 라면 중에서)

고칼로리 건조식품. 수프의 감칠 맛이 한국인의 입맛을 붙들어 놓았다면, 고칼로리의 건조면은 한국인이 라면을 많이 먹게 된 경제적인 이유일 터다. 건조면은 싼 값에 대량 유통을 가능하게 했고, 적은 돈으로 배불리 한 끼 식사를 해결하도록 했다. 튀긴 면은 그 배부름이 오래 지속되도록 해주고 높은 열량으로 강도 높은 힘을 내게 해준다.

한국에 인스턴트 라면이 소개된 것은 1960년대 초반이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국 경제가 일어서기 시작할 때 라면이 등장했다. 김훈은 에세이에서 "이 배고픈 시절에 나타난 라면의 맛은 경이로운 행복감을 싼 값으로 대량 공급했다"고 말한다(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196페이지 '후루룩 목이 멘다'라면 중에서). 4.19세대든, 386세대든, 월드컵, 촛불 세대든 라면을 먹으며 청년기를 보냈고, 우리 입맛은 라면에 길들여졌다.

라면을 통해 본 시대상

그렇다면 우리 문학에서 라면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 라면이 국내에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초 무렵이다. 그때 라면은 어쩌다 맛보는 영양의 보고였다. 그 풍경을 이문열은 소설 <변경>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노랗고 자잘한 기름기로 덮인 국물에 곱슬곱슬한 면발이 담겨 있는데, 그 가운데 깨어 넣은 생계란이 또 예사 아닌 영양과 품위를 보증하였다. (…) 철은 갑작스레 살아나는 식욕으로, 그러나 아주 공손하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있는 듯했다.' (소설 <변경> 제 7권 177페이지)

이때의 라면 맛은 이후 닥쳐올 산업화, 도시화 시대 삶의 맛이고, 사람들은 이 맛에 인이 박혀 주눅 들어 살게 될 것임을 작가는 '공손하게' 네 글자로 함축하고 있다. 이를 좀 더 적나라하게, 심층적으로 말한 이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다. 선생은 국물을 자작하게 부어 떡처럼 만들어 안주로 먹었을 만큼 라면을 즐겨 드셨는데, 문학평론가답게 라면의 정체성을 이름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어로 드물게 'ㄹ'로 시작되는 라면을 기술문명, 대량생산되어 낮은 가격으로 판매되는 규격품이라고 특징짓는다. 그는 "라면이라는 이상한 말로서는 외래적인 문화가 우리 문화에 억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규격 생산품으로서는,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를 그것이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 문학전집 14권 <두꺼운 삶과 얇은 삶>, 394페이지 '라면'문화 생각 중에서)

시대를 관통해 라면은 구휼의 상징 같은 식품이다. 이 상징이 비틀어 비춰지면 궁상으로 보인다. 가난을 은유적으로 드러낼 때, 라면 만한 음식도 없다. 시인 함민복이 80년대 발표한 시 '라면을 먹는 아침' 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 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2001년 출간된 윤대녕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사슴벌레 여자>에는 라면요리사 서하숙이 등장한다. 여기서 인스턴트 라면은 현대 문명의 결정체, 90년대 신세대들의 감각을 드러내는 아이콘처럼 작동한다.

서하숙은 컴퓨터, 휴대폰, 냉장고 등 현대문명 기기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여자다. 거식증에 걸려 7년째 라면만 먹고 사는 그녀는 여가시간에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컴퓨터나 종이접기를 하며 혼자 시간을 보낸다. 라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조리법을 알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에 답변하며 라면 전문점에 조리 강습을 해주고 생계를 유지한다. 음악과 미술, 영상에 관한 지식들이 넘치는 이 감각적인 소설 속 라면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빈번히 등장하는 스파게티를 연상하게 한다.

시인 신혜정 역시 현대 문명의 아이콘으로 라면을 바라본다. 지난해 발간한 시집 제목은 <라면의 정치학>이다. 시인은 현대 물질문명 사회의 특징을 드러내는 라면을 통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데, 구체적으로 '문명사회에서의 속도'를 성찰하고 있다.

'라면은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으로/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정치적인 이슈는 스프 속에 감춰진 비밀 레시피(…)//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를 분말로 만들어내는/ 물리학의 기적// 팔팔 달아오른 냄비는 뜨거운 욕망을 탄생시키고/ 한 번의 사용을 위해 가지런히 포장된 비닐봉지는/ 원 나잇 스탠딩/ 구깃구깃 쓰레기통에 버려지고/부패되지 않는 것들을 양산하는 현대의 문명은/ 한 끼 식사에 30분을 소비하지 않는다' (표제작 '라면의 정치학' 부분)

누구나 먹는다는 평등의식

한국인이 평균 3일에 한 번은 먹는다는 라면. 우리가 인이 박히도록 라면을 먹어대는 것은 사실 영양과 칼로리 때문도, 그것이 가진 정치적인 함의 때문도, 가난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때문도 아닐 터다.

지난 17일 김윤옥 여사가 "손주들과 라면 끓여먹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과의 공통 취미라고 밝혔다. 이날 청와대에 초청한 도서벽지 어린이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라면의 사회적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정치 프로파갠더 7가지 모델 중 하나로 거론하는 '보통 사람의 이미지'를 드러낼 때, 라면은 더 없이 좋은 기제로 쓰인다.

나이와 성별, 계층에 상관없이 동일한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인의 평등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라면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끓여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YS의 칼국수보다 더 친근하며, 싼 값에 대량 유통된다는 점에서 DJ의 삼계탕보다 더 부담 없다.

누구나 즐기는 먹을거리. 소득과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먹는다는 평등의식과 편재성, 만만함이 우리가 라면을 찾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하루는 밖에 나간 엄마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급한 볼일이 있어 서둘러 나오느라 미처 점심을 챙겨놓지 못했으니 미연 아버지와 함께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라는 거였다. (…) 그것이 미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이후, 우리가 나눈 가장 긴 대화였다. 라면은 그냥 '민짜'로 끓이는 게 낫다는 것과 '라면은 역시 삼양라면'이라는 내용이 전부였지만 그나마 라면에 대한 취향이 둘 다 같다는 것을 확인한 중요한 대화였다.'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 240~24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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