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디지털 브러시] 디지털 예술이 잃어버린 전통적 붓질에 대한 향수

아르테 포베라 운동의 대표작 중 하나인 Michelangelo Pistoletto, Venus of the Rags, 1967.
연필로 글을 쓰는 것과 붓으로 글을 쓰는 것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연필로 글을 쓸 때 지면에 연필심이 닿는 느낌, 그리고 몸통 부분에 쥐어진 손가락의 힘은 화선지 위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공중에서 휘갈기는 붓의 느낌이나 힘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글씨로 글을 쓰는 것은 곧 인격의 도야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손의 사용과 관련된 활동이다. 그런데 이때 손의 사용은 단순히 기계적인 도구의 사용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만의 고유한 손의 사용이며 이것은 인간 자신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을 빌자면, 아주 위험한 순간에도 인간의 손은 동물의 손짓과 다르다. 가령 어떤 신체적인 위협이 가해질 때 인간의 손은 거의 본능적으로 방어하는 자세를 취할 것이다.

이 방어의 자세는 거의 동물과 흡사한 본능적 행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러한 본능적 행위의 순간조차 인간의 손짓은 단순한 본능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짧은 순간에 인간은 외부의 공격이 어떻게 취해질지 예상하고 그것에 대응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손을 환경적 상황에서 분리시킨다는 이유로 타자기를 비판했다.
물론 예상이 빗나갈 수도 있고 대응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손짓은 외부환경과의 오랜 마주침 속에서 형성된 인간존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글을 쓰는 손의 동작이 단순한 도구적 행위일 리가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당시 새로운 글쓰기인 타자기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타자기는 인간의 손을 환경적 상황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손은 더 이상 그 고유한 인간의 신체적 움직임이나 존재의 표현이 아니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은 그저 글을 쓰는 도구일 뿐이다. 타자기는 손과 종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더 이상 글을 쓰는 손의 움직임을 필요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디지털 워드프로세서의 등장 이후 더 심화되었다. 컴퓨터가 타자기마저 대체한 이후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발생할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글을 쓰는 손은 키보드의 자판기를 두드린다. 이러한 손짓은 게임할 때 메뉴를 선택하거나 맵을 선택할 때 사용하는 키보드 자판위의 손짓과 다를 바가 없다. 글을 쓰는 손짓은 더 이상 인격의 도야과정도 아니고 인간적인 손짓도 아니다. 그것은 기계작동의 일부가 되었다.

디지털 회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여기서 비롯된다. 흔하게는 붓이나 나이프, 드물게는 손가락이나 여타의 도구를 활용하여 선을 그리고 채색을 하는 전통적인 회화나 판화의 작업과는 확연히 다르다. 디지털 회화에서 이른바 전통적인 회화의 붓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지털 회화 혹은 디지털 판화라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컴퓨터 그래픽 작업, 혹은 사진이나 스캐너를 활용한 리터치 작업 또한 평면 혹은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회화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생이라든지 채색작업과 같은 손과 인격의 도야과정은 전제되지 않는다.

Giovanni Anselmo, 비틀림(Torsione), 1968
사실 미술에서 전통적인 수작업에 대한 회귀나 강조는 미디어아트가 출현한 이후에 등장한 현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레디메이드나 팝아트가 등장한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전통적인 회화의 위기감은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위기감이 예술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196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중 하나인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는 팝아트와 레디메이드 이후 지배적인 산업미술의 흐름에서 전통적인 회화의 가치를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말 뜻 그대로 옮기자면 '가난한 예술'인 아르테 포베라는 매우 소박한 일상적인 소재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산업사회의 미술관행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아르테 포베라는 매우 역설적이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산업사회의 미술관행을 비판하고 전통적 예술의 가치를 표방한다.

가령 조반니 안젤모(Giovanni Anselmo)의 '비틀림'(Torsione, 1968)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그림에 나타난 대로 길고도 육중한 강철막대의 가운데 부분을 기다란 헝겊으로 묶은 다음 헝겊을 여러 번 꼬아서 벽에 걸어놓은 것이다. 벽이 강철막대를 저지하고 있지 않다면 헝겊의 복원력 때문에 강철막대는 관람객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위태로움은 어쩌면 산업사회를 이끄는 하나의 동력일지도 모른다. 벽의 저항으로부터 풀려나는 순간 강철막대는 빙글빙글 돌면서 용솟음칠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잠재된 용솟음과 위태로움이 바로 강철과 헝겊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재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자동장치도 아니며 극히 원초적인 재료를 통한 수작업의 결과물인 것이다. 안젤모의 작품이 단순히 과거 재료의 회귀나 형이상학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끝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에 대한 향수나 오마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 이후 디지털 이미지는 더 이상 전통적인 붓질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디지털 예술에서도 물론 디지털 브러시의 과정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 브러시는 손에 의한 붓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일종의 필터링 작업이며 리터치의 과정이다. 분명히 수작업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회화(?)는 디지털의 작업에 오염되지 않은 붓질 혹은 붓질효과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디지털 예술이 잃어버린 전통적인 것에 대한 향수로 나타난다.

Michael Dudok de Wit 감독의 '아버지와 딸'
네덜란드 출신의 마이클 두독 드 위트(Michael Dudok de Wit) 감독의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은 어린 시절부터 호숫가에 마중을 나가서 아버지를 기다리곤 하던 한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며 회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마치 디지털 작업과 무관한 듯 페이퍼 드로잉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색상도 거의 배제되었다. 이러한 모든 장치들은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고 다시 할머니로 쇠퇴해나가는 주인공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극대화하는데 사용된다. 주인공의 아득한 그리움은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효율적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 애니메이션이 전통적인 회화의 브러시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혀질 수 있다. 나이가 들고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상실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존재는 어느 순간 기다림이 아닌 그리움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예술에서 전통적인 붓질은 더 이상 도래할 어떤 것으로서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전통 예술이 지닌 아우라는 과거의 것으로서 디지털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 찬양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따라서 디지털 예술은 전통예술의 아우라를 계승할 수는 없어도 그것에 오마주를 선사할 수는 있을 뿐이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