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애플그린을 먹다>, <사천가> 등 판소리 다양한 변주 시도

판소리가 늘 '노인들을 위한 음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인 신영희 명창은 국악 공연보다 코미디언 김미화의 '쓰리랑 부부' 코너로 다양한 연령의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MBC 드라마 <대장금>이 인기일 때는 주제곡 '오나라'의 목소리에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박애리는 이후 '젊은 명창'으로 방송과 공연을 넘나들며 젊은 관객에게도 우리 소리를 알리고 있다.

박애리와 함께 국립창극단 소속의 스타 소리꾼인 남상일은 '시사판소리'와 '창작판소리'의 달인으로 기존 판소리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있다.

현장과 관객의 거리가 너무 멀어 외로웠던 판소리가 관객의 요구에 맞춰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한동안 퓨전국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실험은 국악 안에서의 이종 결합, 현대음악으로서의 판소리, 다른 장르와 결합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등 영역 바깥으로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언제까지나 아날로그의 세계를 고수할 것만 같던 판소리 명인도 디지털 시대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올해 초 디지털 디자인 회사 디스트릭트가 사물놀이와 3D 입체영상을 결합해 선보였던 디지로그 사물놀이 <죽은 나무 꽃 피우기>에는 안숙선 명창이 참여해 공연을 빛냈다.

국악 뮤지컬 '판소리, 애플 그린을 먹다'
안 명창은 이 공연과 같은 시기에 다른 공연이 있었지만 양쪽 공연에 모두 출연할 수 있었다. 첫날 공연만 '진짜 안숙선'이었고 나머지는 '홀로그램 안숙선'이었기 때문. 누구보다 '생 목소리'의 중요성을 아는 안 명창이었지만 실물과 같은 영상과 소리로 구현되는 공연 양식의 첨단성에 구세대의 명인도 기꺼이 디지털 세계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물론 판소리의 변혁은 젊은 소리꾼들 사이에서 더욱 거세게 불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들이 국내 최초의 국악뮤지컬집단 '타루'다. 2001년 창단해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국악뮤지컬을 창작해온 타루는 국악의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틀에 갇히지 않은 기발한 감각으로 판소리를 재창조해 인기를 얻어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판소리, 애플그린을 먹다>다. 2005년 초연 후 꾸준히 공연되고 있는 이 작품은 국악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넘어 범 뮤지컬공연에서도 유명한 스테디셀러다. '과자이야기', '스물셋 송희', '조선나이키'라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뮤지컬 <판소리, 애플그린을 먹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패러디하고 '나이키'를 소재로 하면서도 판소리의 해학을 잊지 않는다.

특히 '스물셋 송희'에선 타루가 전통과 현대적 실험 사이에서 고민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송희 역의 배우가 전통 판소리처럼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시도하고, 혼자서 긴 시간을 이끌어가는 진행방식 등은 판소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타루의 초창기 멤버인 이자람은 현재 공연계의 블루칩이다. 그는 홍대 클럽에서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더로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영화 <가루지기>의 소리감독을 맡는 등 국악의 지평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뮤지컬로 만들어지는 <서편제>의 주인공 송화 역도 따냈다. 말 그대로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소리꾼인 셈이다.

판소리 브레히트 '사천가'
최근 그가 작업한 공연은 일명 '판소리 브레히트'로 잘 알려진 <사천가>다. 11일까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 <사천가 2010>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천의 선인>을 오늘날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현대판 판소리'다. 브레히트의 '착한 사람'은 이번 판소리 버전에선 뚱뚱한 백수 처녀 '순덕'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브레히트의 극을 처음 판소리로 옮긴 이도 역시 이자람이다. 작가를 구할 수 없어 대본을 직접 써서 4년 전 처음 무대에 올려 화제를 모았던 이자람은 얼마 전 이 작품으로 폴란드 콘탁 국제연극제에서 최고 여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넘치는 끼와 재능은 이번 <사천가 2010>에서도 작, 작창, 음악감독, 출연 등 1인 4역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천가>가 보여주는 새로운 판소리는 연극과 맞물려 현대적인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기존 판소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기도 하다. 기존의 판소리가 고수 한 사람의 장단에 맞춰 공연된다면, <사천가>에선 판소리의 선율과 장단에 베이스와 타악기, 아프리카 젬베와 한국 장구가 어우러져 판소리와 뮤지컬을 특색 있게 결합시켰다. 소리꾼 혼자 극을 끌고 가기 때문에 모노드라마 같기도 하지만, 주요 대목마다 삽입되는 소리꾼의 촌철살인의 평은 관객에게 주제를 환기시켜주며 브레히트 서사극과도 좋은 호흡을 맞춘다.

또 '심청가'나 '흥부가',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만 정통 판소리로 인정되는 현실에서 '창작 판소리'는 그동안 무대에 설 기회조차 드물었다. 이자람은 이런 점을 지적하며 "현대적인 감각과 형식을 적용한 새로운 창작 판소리를 통해 판소리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가능성은 공연을 통해 벌써 검증되고 있다. 고어가 아닌 요즘 세대의 말로 바뀌어지고 유머가 가미된 판소리는 일상적 대사보다 관객의 웃음을 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낸다. 남인우 연출은 "해외 공연에서도 동시통역을 통해 대사를 듣는 외국인들이 폭소를 참지 못했다"고 전하며 판소리의 보편적 잠재력을 뒷받침했다. 이런 호응에 힘입어 <사천가>는 올 하반기와 내년 초에 미국과 프랑스 공연을 앞두고 있다.

젊은 소리꾼들의 실험과 도전은 국악이라는 옛 이름이 아닌 동시대 예술이라는 더 큰 틀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한국적'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렸던 선배들과는 달리,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대본과 연출, 연기까지 아우르며 동시대의 '우리 소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